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

2022. 12. 10. 08:0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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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중국과 통하기는 멀리 단군·기자부터이지만 문헌이 없어져 자세히 알 수 없다. 수·당 이래로는 이를 간책에서 고구할 수는 있지만 대개는 적막하여 부족하다. 당의 대어사 최치원에 이르러 문체가 크게 갖추어져 마침내 동방문학의 조가 되었다.’17세기 비평가 홍만종
후대에 최치원은 우리나라 문학의 조종으로 평가받을 만큼 그는 우리 문학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하여 관직을 받은 신라인이자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문학인들과 교류를 한 사람으로 말년에는 신라로 돌아와 보내기도 했습니다.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며 서기 857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12세가 되는 868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습니다. 당시 나당의 외교형태로는 왕족을 인질로 보내어 당의 조정에 대위케하는 숙위와 더불어 몰락왕족 혹은 그 다음가는 계층의 출신자를 당의 대학 등에 입학시키는 숙위학생이 있었는데 당시 신라에는 당나라 유학바람이 불었고 837년 한 해에만 216명이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갔을 정도입니다. 이 숙위학생은 보통 10년 정도의 수학 기간을 거쳐 빈공과라는 시험을 보게 합니다.
‘십 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아라. 가서 공부에 힘을 다하여라.‘
12세의 최치원에게 한 그의 아버지의 말은 잔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최치원은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는 표현으로 공부에 매진했고 목표보다 빠른 6년 만에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강소성 강녕의 현위가 되었으며 이 시기에 그의 시문을 모은 중산복궤집 5권을 쓰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지역 율수현 현위로 있을 무렵 그 곳에 쌍녀분이라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은 16살과 18살에 한을 품고 죽은 장씨 자매가 주인으로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번 늙은 소금장수와 차 장수에게 자신들은 시집을 보내자 한을 품고 죽어서 묻혔다는 곳입니다. 최치원은 이곳을 시찰하다가 이 무덤 곁에 유숙하여 잠을 청했다가 꿈 쏙에 자매를 만났습니다. 최치원이 먼저 “어느 집 두 여인이 버려진 무덤에 깃들어 쓸쓸한 지하에서 몇 차례나 봄을 원망했나요.”라고 시구를 보내니 이에 자매는 살아 있을 때는 나그네를 몹시 부끄러워했는데 오늘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교태를 뿜도다.”라고 답하여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아마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젊은 관리 최치원이 비슷한 나이에 돈에 팔려가는 것에 싫어 죽음을 택한 두 처녀의 이야기에 안타까움을 느껴 이러한 시문을 적었고 이후에 허구적인 이야기가 더해져 오늘날에 전설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는 당나라에서도 인정받는 문학가였습니다.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열여덟에 문단을 휩쓸어/한 화살로 금문책을 꿰뚫었네
과거 급제 동기였던 고운이라는 사람이 그를 신라로 보내주면서 최치원에게 준 시로 최치원은 당대 유명한 시인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해박하고 틀림이 없는 그의 고사나 문장으로 당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중국과 일본의 시집에도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25세가 되던 서기 875년, 황소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그는 제도행관병마도통인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며 지은 글이 바로 ‘격황소서(檄黃巢書)’입니다. 
불유천하지인(不唯天下之人) 개사휸륙(皆思顯戮)/천하사람들이 모두 그대로 내놓고 죽일 것을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억역지중지귀(抑亦地中之鬼) 사의음주(巳議陰誅)/지중의 귀신들 또한 그대를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하고 있다.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자기도 얼굴이 창백해지고 상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글이 수록된 책이 바로 『계원필경』입니다. 이 책은 그가 율수 현위로 있던 시절 그가 지은 글 중 빼어난 글을 담아놓은 것으로 당시 최치원은 1만 여수에 달하는 시를 지었으나 그 중에 일부만 추린 것입니다. 이 문집에 실린 시 60편과 문장 310편은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중요한 가치를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을 중국에서도 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당대의 역사서로 신당서와 구당서는 물론 『자치통감』에 빠진 내용까지 소상히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저술로서 문집 30권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약속된 부귀영화를 버리고 그는 사랑하는 신라로 귀국합니다. 때는 헌강왕 때 당시 경주에는 초가가 하나 없고 큰 집들 사이에 담장이 잇닿아 있었으며 가취(歌吹)의 소리가 가득차 주야로 그치지 않던 겉으로는 태평성대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신라사회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었으니 후삼국으로의 분열 기운은 평화로운 이시기에 이미 잉태하고 있던 셈입니다. 특히 최치원은 신라의 육두품 출신으로 진골 다음 가는 혈통이었지만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관직은 16개의 관등 가운데 제 6관등인 아찬까지밖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정치적 승진은 제한되지만 학문적인 식견으로 왕권의 주변에 접근할 수 있었고 상황에 따라 골품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함께 후에 반신라적인 성격을 띠었던 것이 바로 6두품입니다. 그리고 기대를 갖고 온 신라는 6두품에게 차별적이었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치원이 몸소 서방에 가서 배워온 것이 많았으므로 돌아옴에 이를 장차 뜻을 펴고자 했으나 때는 쇠계라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 『삼국사기』

계원필경

그는 신라에 돌아와 지방직에 머물렀는데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당시 신라 국학파와 당나라 유학파 간의 갈등이 크게 한 몫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서기 894년에 「시무여일십여조(時務一十餘條)」를 바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아찬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 관직은 6두품인 그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친 시무여일십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글에는 과거제와 민본주의에 바탕한 그의 사상들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추정할 뿐입니다. 
‘불은 나무에서 났지만 불이 맹렬하면 나무를 태우고, 배는 물에 뜨지만 물이 날뛰면 배가 엎어진다. 군주가 실정(失政)을 하면 백성이 군주를 바꿀 수도 있다.’ 
효공왕이 즉위시 쓴 이 글은 신라를 걱정하고 개혁하고자 했던 그의 바람이 담긴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벼슬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지나 왕건이 고려왕조를 세우고 난 뒤 왕건과 최치원이 서한을 주고받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육두품인 최승우가 후백제를 섬기고 최언위가 고려를 섬긴 것과는 달리 그는 더 이상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는 최치원에게 문창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였습니다. 아마도 최치원이 「시무여일십여조(時務一十餘條)」 제출하고 나서는 그의 정치적 행보가 소극적이었는지 몰라도 고려왕조는 그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치원은 신라에 귀국한 이후 함양 태수로 부임하였는데 이 지역에 위천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들 가운데로 흘러 수해로 인해 지방민들의 고충을 겪자 취치원은 이 물길을 서남쪽으로 돌리고 둑을 쌓아 숲을 조성하였습니다. 민생을 위한 그의 조처였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호이자 지식인으로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그 때 시무십여조에는 민생을 위한 조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때 받아들여졌다면 신라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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