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태자는 정말 금강산으로 갔을까.

2022. 12. 12. 08:0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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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태자

‘왕이 고려에 항복을 하자 왕자는 왕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서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밑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으면서 생을 마쳤다.’『삼국사기』
‘태자는 통곡을 하면서 왕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삼베옷을 입고 나무를 뜯으면서 생을 마쳤다.’ 『삼국유사』
이 기록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 태자에 관한 기록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신라의 마지막 왕의 태자는 경순왕의 항복에 슬퍼하면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금강산으로 들어가 풀을 뜯으며 여생을 마쳤을까. 그에 반해 그의 행적에는 역사서에 기록된 짧은 기록과는 달리 민간에서는 그에 비해 많은 전설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마의 태자와 관련있는 지명들

인제군 상남면에는 옥새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옥새란 임금의 인장를 말하는 것으로 이곳의 옥새바위는 마의 태자가 이곳에 숨겨놓았다고 하며 이 옥새를 지키기 위해 뱀이 이곳을 호위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리고 마의 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어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근처의 ‘수구네미’, 그리고 수구네미를 넘어선 김부리라는 마을에는 대왕각이 있는데 이 전각 안에 모신 위패의 주인공은 경순대왕의 태자라고 합니다. 사실 마을에서 이러한 전각을 짓고 역사적인 인물을 모실 때에는 그 인물이 이 지역에 잠시라도 머물렀다라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마의 태자는 강원도 인제에 한 번 쯤은 왔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의 태자는 왜 이 곳에 왔을까. 실제로 이러한 마의 태자의 행적에 대해 기록과 다를 것이라고 합니다. 기록에서는 신라가 항복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으며 여생을 마쳤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 부흥운동을 도모했고 이러한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이러한 마의 태자의 해적을 가늠케 하는 지명은 더 남아 있습니다. 비슷한 지역에서 마의 태자는 의병을 모아서 신라재건을 도모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뜻을 같이 한 사람 중에 맹장군이 있었으니 그 맹장군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맹개골’, 신라부흥군의 군량미를 모아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양구군 군량리, 마의 태자가 군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투영된 ‘다무리’ 등 비슷한 지역에서 마의 태자와 관련된 지명이 지속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마의 태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관동의 인제현에 신라 경순왕이 살던 지역이 있어 이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명명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인제 김부리에 있는 대왕각의 주인은 위패에 새겨진 김일(金鎰)이라는 이름으로 마의 태자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부리라는 마을의 이름이나 옛 기록에 의하면 경순왕이 이곳에 왔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그럼 대왕각의 주인은 본래 마의 태자가 아니라 경순왕은 아니었던 것일까요. 당시 후삼국을 맞이하게 된 경순왕의 심정을 보면 강원도 인제에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경순왕은 고려로 귀부하는 문제를 두고 신하들과 논의했을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사람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고 특히 마의 태자가 강력하게 반대하며 사직을 보전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과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려로의 귀부를 결정합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귀부를 결정한 그가 개경으로 떠나는 길에 인제에 들러 신라부흥운동을 계획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럼 ‘김부리’의 마을 명칭과 옛기록에 명기된 경순왕이 살던 지역이라 김부대왕동이라 했던 것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가 고려에 귀순하고 나서 이 지역에 낙향하여 살지는 않았을까. 경순왕은 고려에 귀순하고 나서 그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됩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경순왕은 고려의 첫 사심관이었습니다.  사심관제도의 목적은 지방에 대한 통치를 원활하기 위함과 그 지역의 인사를 대우하는 목적에 그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심관으로 임명되었다고 해서 해당 지역에 가서 상주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심관이라는 것은 결국 개경에 와 있는 사심관의 출신지 지역의 사람을 관할하는 역할이지 지방으로 내려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경순왕릉이 경기도 연천이 있었다는 것이 그가 고려로 귀순한 이후 내내 개성에 머물다 생을 마쳤음을 의미합니다.

경순왕

그럼 김부리와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의의 김부는 왜 이런 표기가 나온 것일까요. 신라에서는 이름을 향찰식으로 표기할 수 있는데 마의 태자 김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두는 뜻으로 한자로 표기합니다. 익(益)과 부는 ‘넉넉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일과 익은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김일은 김부로 표기할 수 있는데 마의 태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향찰식 표기를 했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의 아버지 경순왕이 김부(金傅)하고 헷갈려 후대에는 마의 태자 김부(金傅)를 경순왕 김부(金傅)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러한 마의 태자의 행적은 더 남아 있습니다.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전설이기는 하지만 마의 태자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지금의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마의 태자에 대한 이야기는 경북 안동에서도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용수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 근처에 마의 태자가 경주땅을 바라보았다던 ‘마의대’, 마의 태자와 관련된 곳이라 여겨지는 ‘태자리’가 있는데 이 곳은 마의 태자 전설과 더불어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왔을 때 태자가 머물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이 외에도 마의 태자가 경주를 바라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봉우리인 ‘만리봉’과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건지산’, 그리고 ‘투구봉’과 ‘마장리’는 신라부흥을 꿈꾸던 마의 태자가 군사훈련을 시킨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리고 달래재길이라고 하는 이름은 마의 태자가 스스로 한을 달랬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적어도 이러한 전설로 볼 때 
마의 태자가 고려의 귀순에 스스로 분함을 삼키고 순순히 금강산으로 들어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살았을까 의구심이 듭니다. 
그럼 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는 왜 마의 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기록했을까.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신라삼성연원보』


이 기록에 따르면 마의 태자가 두 명이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이 기록이 담긴 책에 대해 진위여부가 문제이긴 하지만 만약 마의 태자가 2명이었고 그 중 한 명은 부흥운동에 직접 이끌고 나머지 한 명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면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닌 게 되고 그렇다고 민간에서 전해져 오는 전설도 잘못된 것은 아니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심할만한 것이 있습니다. 금강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여기서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마의 태자가 이곳에 들어갔다면 그저 스스로 목숨을 끊으러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표현된 개골산도 『고려사』에서 일반화된 지명으로 고려사에서도 주로 금강산으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그럼 금강산에 있는 마의 태자 유적지는 후대에 조작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금나라가 건국 되기 이전 여진 족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 『송막기문』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했다.’ 『만주원류고』
아마 그 신라인은 고려로의 귀순을 거부한 신라 지배층 세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꼭 마의 태자가 아니더라도 마의 태자 아래에서 항려운동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마의 태자의 신라부흥운동은 만주에서 그 꿈이 이루어진 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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