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금성에 백만 명이 살았을까.

2022. 11. 6. 20:3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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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경 전체 디지털 복원도

신라의 수도는 경주였습니다. 그로 인해 현재 경주에는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첨성대을 비롯한 왕릉급 무덤등 각종 유적이 위치한 경주는 그야말로 역사박물관이란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신라의 도읍지로서의 경주의 모습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주를 왕경이라 불렀습니다. 임금이 거주하는 수도란 뜻으로 조선왕조실록에도 한양을 그리고 고려사에서는 개경을 그리 불렀으므로 왕경은 당시 수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신라가 991년 동안 지속되는 동안 경주는 왕경으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1000년이 가까운 왕조 역사도 흔치 않은 일인데 그러는 동안 왕경이 바뀌지 않고 계속 유지되었던 것도 흔하지 않습니다. 
“신라 전성기에 경중(京中)에 17만8963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삼국유사』
옛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경주에는 17만8963호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 집마다 5~6명의 가족이 살았다고 생각하면 신라의 왕경에는 100만 만명에 해당하는 인구가 살았던 대도시입니다. 대한민국 이전의 조선에서는 4만에서 5만 정도의 가구가 있었다고 하니 신라의 가구수를 기록한 『삼국유사』의 기록에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의 생각도 일반인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 20만 정도의 인구가 살던 왕경이었는데 신라의 왕경에는 10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살았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17만8963구(口)를 17만8963호(戶)로 잘못 적었다는 의견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록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이러한 생각에는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꾸어 이야기한다면 현대로 가까울수록 도시에 사는 인구가 더 많아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북국 시대 때 많은 사람들이 경주에 몰려 살았지만 고려 왕조가 들어선 이후 도시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작아져 현대의 경주처럼 되었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계급이라 하더라도 관직을 떠나면 낙향을 해서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골품제라는 독특한 신분제도를 유지했고 그리하여 상위계층을 더더욱 경주에 모여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당시 신라에서 사람들의 수를 일일이 조사했겠느냐며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 소장된 신라 촌락문서에는 당시 인구가 연령별로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가축의 숫자까지 적혀있으니 이러한 신라의 기록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이러한 당시 신라의 왕경의 팽창은 유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고분은 초기부터 도시 안에 있었는데 6세기 이후에는 외곽으로 자리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신라의 왕경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경주는 수도방어를 위해 산성을 쌓았는데 시기에 따라 3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가장 바깥쪽에 있는 산성들을 경계로 당시의 경주의 규모를 짐작한다면 현재 경주시의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경주의 외곽지역에서는 숯을 굽는 가마터가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40 곳 중 20곳에 해당합니다. 당시 신라 민간에서는 숯을 태워  취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당시 왕경의 외곽지역에서 숯과 토기 등을 구워 공급하는 곳이 자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신라의 늘어나는 인구와 함께 경주는 자연스럽게 팽창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100만 명이 사는 신라의 왕경의 모습을 자연스레 그려볼 수 있습니다. 

경주엑스포공원을 방문한 관람객이 '신라왕경도 모형'을 관람하고 있다.

신라의 왕경 경주의 모습은 발굴 작업으로 인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시 계획의 기본단위로 방이 있는데 기록에서는 경주에는 360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7년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지적도에서 경주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수로와 도로가 거의 일직선으로 십자로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경지정리가 이루어지기 전이니 경주는 이른 바 계획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주 시내에는 360방이 퍼져 있으면서 오늘날에 차가 다니기 손색이 없을 정도의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던 도시였습니다. 도로는 폭 15.5m, 자갈과 점토를 섞어 층층이 다진 구조로 맨 위에 마사토를 깔았으며 이러한 모습은 차가 다녀도 상관없을 정도입니다.
“영흥사에 화재가 나 민가 350채가 한꺼번에 불탔다.” 『삼국사기』
이러한 기록은 당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벌어진 참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옛 기록에서는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를 제한하기도 했으니 신라는 진골은 24척,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기지 못하도록 규정합니다. 이것은 비단 신분제도를 지키기 위한 약속일 뿐 아니라 당시 집의 면적을 규제해야 할 만큼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신라의 도읍지 경주에 100만 명이 살고 있었다면 그 많던 사람들은 순수 신라인들로만 구성되었을까 궁금해집니다. 과연 외국인들은 없었을까.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와서 영구 정착한 이슬람 교도들은 그곳의 여러 가지 이점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제(諸) 도로 및 제(諸) 왕국 안내서』 이븐 쿠르다지바 
이슬람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는 신라의 기록은 없지만 이슬람에서는 신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세기 중엽 출간된 알 마수오디의 『황금 초원과 보석광』에서는 "이라크 또는 다른 나라로부터 그곳으로 간 외국인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고 농토가 비옥하고 또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신라는 당시 꽤 살기 좋은 나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슬람 사람들이 머물다간 신라의 도시는 아무래도 도읍지였던 금성, 오늘날의 경주였을 것입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원성왕 11년인 795년 ‘당 사신인 하서국 사람 둘을 데려와 동해의 두 용과 분황사 우물의 용을 잡아간 것을 왕이 풀어주도록 했다.’라고 기록하였으니 이 때 하서국 사람들은 이슬람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치원이 기록에서 속독으로 표기되는 소그디아나가 나오는데 이들은 소그드인들로 이들인 속독악으로 유명했다고 하니 이들은 신라 내에서 공연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원성왕과 흥덕왕의 능 앞에 있는 무인석상은 흡사 아라비아인들과 닮아 있으므로 생각보다 이슬람인들의 신라 사회에 깊이 들어와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御駕) 앞에 나아가 노래하며 춤추는데 그 생김새가 놀랄 만하고(形容可駭) 옷이 이상하여(衣巾詭異) 그때 사람들이 산해의 정령(山海精靈)이라 일컬었다' 『삼국사기』
역시 이 글에서 나오는 인물도 아랍인 또는 이슬람인들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문화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신라시대에도 해당하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에 살던 다양한 사람들이 신라로 흡수되었으니 아마 그 사람들도 순수한 한반도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8세기 이후 신라를 찾은 이방인들은 국제교역상인과 무용수, 악사 위주로 보고 있고 따라서 서역과 아라비아에 건너온 사람들까지 경주는 아마 100만 명이 사는 국제도시로서 그 풍경이 현대의 대도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국적이고 다문화적인 모습을 풍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경주에서 확인된 당대 사찰만 200개소가 넘고 시장에는 감시와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 관원이 상주했는데 이들 수가 30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의 장안성 시장 관원이 28명이었다고 하니 신라의 경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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