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발한 무역을 펼친 발해

2022. 12. 14. 08:1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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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 발해 유적의 온돌 모습

우리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가진 발해는 휴전선 이북에 나라가 있었던 탓에 그 자료가 않습니다. 하지만 당대에는 해동성국이라 불릴만큼 강성한 나라였고 우리가 발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비해 훨씬 더 개방적이고 활발한 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상경성으로부터 출발하는 다섯 개의 국제교역망으로 이 5개의 길을 각각 거란도, 영주도, 압록도, 신라도, 일본도로 부릅니다. 그러면 발해는 얼마나 활발한 교역을 했던 나라였을까. 
북한 땅에서 멀지 않은 러시아 영토 안에 크라스키노라는 곳이 있고 여기에는 발해유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크라스키노 성인데 여기서 발견된 토기조각들은 고구려의 양식을 띠고 있었고 성은 고구려의 것에서 보이는 옹성의 구조와 돒출된 부분인 치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크라스키노 성은 발해의 것으로 일본으로 가는 길의 출발지로 보고 있습니다. 상경성에서 뻗어나가는 일본도의 중간출발지점이기도 크라스키노성은 근래에는 발해가 계획하여 만든 도시임이 밝혀지면서 발해가 크라스키노 일대를 중요시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 유적에서 도로망으로 도시를 구획한 흔적은 발해 상경도성 외에는 없었는데 이후의 발굴 작업을 통해 발해의 지방도시 중에는 크라스키노 성이 계획도시로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출발한 발해의 항해는 안전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 기록에서는 제3대 문왕 시기인 776년에 일본왕 조견을 위해 사도몽을 인솔자로 하여 167명의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일본으로 가던 일행은 조난을 당해 46명만이 일본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일본에서 사신일행이 동해를 건넜는데 험한 파도와 폭풍우로 인해 배가 파손되어 크라스키노에서 두 척의 배를 새로 만들어 일본으로 귀국했습니다. 이 외에도 786년에는 표류하다가 65명 중 12명이 하이인(아이누족)에게 죽고 41명만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일본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발해인들은 일본으로 가는 항해를 위해 조선술과 항해술을 발달시켰고 그리하여 신라가 일본과 10여 차례 공식 사절단을 주고받는 사이에 발해와 일본 사이에는 48차례의 교류가 기록되었으며 이중 발해가 일본으로 간 것은 34차례였습니다. 발해가 일본과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했던 이유는 아마 당나라와 친하게 지냈던 남쪽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한 목숨을 담보로 하는 동해안의 항로개척은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발해 이전부터 한반도 국가와 일본 간에 교류는 이루어져왔으나 시간이 지난 발해시대에도 그 길은 위험했을 건데 발해인들은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아마 발해 때에 이르러 사람들은 계절풍을 이용한 항로가 활용하고 일본으로 갈 때에는 9월과 12사이에 출발하여 북서풍과 한류를 타고 일본으로 갔을 것이며 반대로 일본에서 발해로 갈 때는 6월과 8월 사이에 출발하여 동남계절풍과 북상하는 해류를 타고 발해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들 간의 길에는 사절단을 호송하는 호송사를 동행시켰으며 이는 서로 간에 안전한 귀국길을 위해 상대국의 해안까지 동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호송선은 810년 이후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한 항해술과 함께 조선술이 발달이 동반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발해 사신이 읿본에 가지고 간 국서

이렇게 일본도에 활용했을 발해의 배 모양을 알고 싶지만 발해 선박과 관련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발해의 배를 그리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다만 발해의 배는 삼각형의 돛보다는 바람의 여러 형태를 이용할 수 있는 직사각형의 돛을 썼을 것으로 보이며 해안선이 단조로운 동해안의 특성에 맞게 침엽수를 재료로 하여 평저선보다는 첨저선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일본으로 가는 발해의 배는 초기 20명 정도가 탑승하는 정도였으나 771년에는 17척의 배를 325명의 사람들이 일본으로 갔고 9세기부터는 100명 이상 탑승할 정도로 배가 커졌습니다. 엔닌의 『입당구서순례행기』에서 당나라 등주 삼천포에서 발해의 수많은 무역선을 보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배를 만드는 기술은 고대국가의 경제력과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른 발해의 조선술은 발해 국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은 초기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으나 이후에는 무역에 뜻을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이를 통해 발해와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고 발해의 특산물을 사갔습니다. 871년에는 일본의 관리들이 발해의 물건을 구입하고 40만 전을 지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발해는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남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일본은 부담을 느꼈는지 9세기초에 발해의 사신이 입국하는 횟수를 12년마다 정하고 그 인원도 105명으로 정한 뒤, 이를 위반하면 추방했다고 합니다. 
그럼 무역을 위해 발해인들은 무엇을 팔았을까. 일본으로 건너간 발해인들은 담비와 호랑이, 표범, 말과 곰같은 짐승가죽과 더불어 모피, 꿀, 인산, 산삼같은 토산품, 그리고 광물, 명주, 해표피와 같은 수공업제품과 동남아시아산 붉은바다거북껍질로 만든 술잔인 대모배를 수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면, 명주, 수은 등을 수입하며 돈을 받은 것입니다. 
발해인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국가들과도 교역하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80km 떨어진 야누치노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곳에는 노보고르데예프카라는 발해의 성이 있습니다. 고구려식의 온돌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발해의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곳 근처에서 또다른 취락지가 발견되었고 여기서 발견된 청동제 유물들은 중앙아시아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8세기에 제작된 중앙아시아 은화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앞면에 왕관과 함께 ‘부하라의 군주 짜르’란 소그드 문자가 새겨져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쩌다가 중앙아시아에서 제작된 은화가 극동지역까지 올 수 있었을까. 한편 남부시베리아 치타시에서 고구려인들이 사용했을 법한 등자가 발견되었고 이 지역에서는 중앙아시아인들이 사용한 쌍이형 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에는 11개의 악기가 새겨져 있는데 이 중 소와 생황은 중국의 악기이고 나머지는 서역의 것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이곳이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문물이 만나는 중간지역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곳을 통하여 발해의 담비가죽이 중앙아시아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당시 실크로드라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길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당시 실크로드는 중국인들과 다른 민족들간의 다툼으로 인해 안전한 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발해인들은 치타와 하바로프스크를 경유하는 길을 이용했을 것이고 이 길은 실크로드보다 위도상으로 위에 있던 길이었습니다. 당시 담비의 모피는 최고의 상품이었으며 지금도 최고의 상품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담비모피는 지배층이 원하는 상품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거리가 멀더라도 발해인들이 만든 모피는 중앙아시아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간의 융합모습을 보여주는 발해유물


  발해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개방적인 나라였습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발해의 유물이 있는데 그것은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의 융합된 모습이 포착된 것입니다. 동경용원부에서 발견된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의 목에는 십자가를 걸고 있었고 발해의 서변에 위치한 우순 지역에서는 수백점의 십자가가 발견된 것입니다. 당대 신라 경주에서도 석십자가와 성모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아마 이것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와 성행했던 네스토리우스파와 관련있을 것입니다. 
발해는 여전히 미지의 나라입니다. 그런 발해에 대해 해동성국이란는 표현을 하며 우리 민족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며 우리 역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발해는 글로벌 국제 국가였습니다 신라의 경주의 외항 울산항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드나들며 이국적인 모습을 한 처용이 경주의 거리를 돌아다녔을 것인데 아마 신라에 비해 발전이 뒤처지지 않았던 발해의 상경성도 그러한 국제적이고 다양함이 뒤섞인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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