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동이인가 북적인가

2023. 10. 24. 20:3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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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조선족박물관은 발해 건국과 관련해 "발해국은 속말말갈인을 주체로 건립된 정권이다. 말갈 수령 대조영이 부하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해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박물관은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말갈인과 함께 세운 발해의 역사적 의의는 물론이고 건국 과정 설명에서 고구려 관련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발해 시조 대조영을 말갈인으로 규정해 발해가 중국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인 것처럼 만들어 사실상 발해사를 중국사로 편입시켰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발해와 말갈은 어떠한 관계일까. 
일단 말갈에 대해 중국은 북적이라 했는데요. 북적(北狄)은 북쪽 오랑캐라는 의미로, 중국 기준 북쪽에 있는 이민족을 칭한 호칭입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리상 중국 동쪽과 북쪽은 육로로 쭉 이어져 있어서 명확하게 나눌 기준이 없기 때문에, 중국의 동북쪽에 있는 이민족은 시대에 따라 중국 마음대로 동이로도, 북적으로도 분류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는 수서 열전에 따르면 백제, 신라와 함께 동이로 분류되었지만, 인적 계통이나 영역이 고구려와 대동소이한 발해는 정작 신당서에서 북적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말갈도 수서에서는 동이로, 당서에서는 북적으로 분류된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고구려는 동이이고 발해는 북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측면에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구당서』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속한 동이전 다음의 권에 말갈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반면 『신당서』에서는 ‘북적전’의 한 권 앞에 나온다고 하는데요. 어찌되었든 발해에 대해 북적에 속하는 나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고구려의 뒤이어 일어난 것이 발해인데 고구려는 동이이고 발해가 북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편 『수서』에는 말갈도 동이의 나라로 분류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수서』에는 발해의 기록은 없는데 그것은 『수서』라는 책이 발해가 건국되기 전에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구려를 뒤를 이은 것이 발해이니 발해도 동이의 나라에 해당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발해더러 ‘드디어 해동의 강성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고 있으니 이 기록은 필시 북적보다는 동이가 어울릴 것입니다. 하지만 『당서』에는 발해가 북적을 분류된다는 점은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면서 ‘본디 고구려에서 갈라진 부족이다’라고 하였는데요. 이후의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본디 속말말갈이며, 고구려에 의지하던(붙어있던) 자로 성이 대씨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당나라의 집권자는 측천무후로 그는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봉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걸사비우가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걸사비우가 죽고 걸걸중상도 죽었는데 이후에 걸걸중상의 아들 조영이 나라를 세우고는 진국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당서』에서 전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구당서』의 대씨와 『신당서』의 조영은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리걸걸중상이란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유민들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쪽에 성채를 만들고 오루하에 장벽을 쌓아 보루로 삼아서 굳게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서는 대씨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걸걸중상의 아들 조영이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세웠다고 하니 『신당서』의 내용과 비교하여 볼 때 조영의 성은 대씨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발해를 설명하면서 『신라고기』를 인용한 글을 실었습니다. 
‘고구려의 이전 장수 조영은 성이 대씨이다. (고구려의) 남은 병력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역시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통전』에서는 ‘발해는 본디 율미말갈이며, 그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진단이라 하였다, (나중에 발해라 일컬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고구려인이란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중국측의 기록을 따지다면 발해에 대해 북적을 분류하기도 하고 건국자의 출신성분에 대해 고구려인지 말갈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기록은 분명히 대조영이라 하고 고구려인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조영은 말갈이라기보다는 그 출신이 고구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006년에는 『발해국사』의 주저자인 웨이궈중(魏國忠) 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원은 발표문에서 말갈은 발해를 건국한 중심종족명인 동시에 초기 국명이라는 주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당나라의 발해군왕 책봉을 받아들인 후 말갈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불렀다’는 신당서 등의 역사 기록을 중심으로 이런 주장을 펼쳤습니다. 왕위랑(王禹浪) 중국 다롄(大連)대 교수는 역시 8세기 중국와 일본의 비문에 ‘말갈국’이라는 기록이 등장하는 고고학 자료에 초점을 맞춰 발해의 초기 국호가 진국(震國)이 아니라 말갈이었다고 강변했습니다. 이에 대해 고구려연구회 회장인 한규철 경성대 교수는 “말갈은 고구려에서 수도였던 평양성 사람을 국인(國人)으로 불렀던 것에 대칭해 고구려 변방주민을 부르던 비칭”이라며 발해를 고구려 유민이 세운 국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말갈이라는 호칭이 중국사서에 6세기 무렵 갑자기 등장하는 데다 그 영역이 숙신과 읍루의 거주지였던 쑹화(松花) 강 중하류를 넘어 만주 전역과 한반도 북부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7개 말갈족은 발해를 건국한 6개의 고구려말갈과 1개의 흑수말갈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넬니코보-1 보루에서 바라본 주변 일대

한편 지난 2015년에는 의미있는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해 보루(堡壘)가 발굴돼, 이 안에 발해가 토착민이었던 말갈(靺鞨)을 복속해 나가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다양한 고고학적 자료가 나온 것입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7~8월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고고민족지연구소(소장 V.L. 라린)와 공동으로 러시아 연해주의 '시넬니코보-1 발해 보루'를 발굴했는데 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군사 요새입니다. 시넬니코보-1 유적은 발해 솔빈부(率濱府, 지방 행정구역인 15부 중 하나)의 옛 땅인 연해주 서남부의 라즈돌나야 강가의 구릉 위에 자리해 있는 관측과 방어용 보루입니다. 이 강은 수분하(綏芬河, 쑤이펀허 강)로도 불리며, 중국 흑룡강성에서 발원하여 러시아를 거쳐 동해로 흘러든다고 합니다. 보루의 성벽은 방어가 취약한 유적 남쪽에만 돌을 이용하여 쌓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흙을 이용하는 말갈의 기술 계통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벽 단면 조사를 통해서는 화재로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지의 일부가 성벽 아래에서 발견되는 등 발해 이전 시기의 문화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유적 발굴을 통해 발해가 토착 집단인 말갈을 복속시키고 말갈과는 구별되는 발해 고유의 방식으로 성벽을 쌓아 보루를 운영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사실은 668년 고구려왕실이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고 할지라도, 고구려땅에 세워진 발해국은 대부분 고구려인들이 주축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불과 40년에 해당하는 시간이 해당 지역의 주민이 고구려인에서 말갈인들로 채워진다는 근거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대조영이 ‘속말말갈’로 기록된 『신당서』기록은 발해주민이 말갈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수서(隋書)』가 '동이열전'에 고구려와 말갈을 같은 범주에 넣었던 것으로 볼 때, 『구당서』 이후의 기록자들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 만에 부흥한 발해국을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보지 않으려는 왕조중심적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또한 말갈은 자칭표현이 아니고  말갈이란 전근대 중국중심과 왕조중심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기록된 당나라 동북방의 이민족에 대한 범칭(汎稱)이자, 고구려변방 주민들에 대한 비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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