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의 왕오천축국전
2023. 10. 26. 07:2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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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慧超, 704~787)는 신라 시대의 승려입니다. 밀교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왕오천축국전』은 신라의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하고 쓴 여행기입니다.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가 중국 북서 지방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하였으며 중국의 나진옥(罗振玉)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책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西域) 각국의 종교와 풍속·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그때는 벌써 불타(佛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혜초스님은 중국의 광주에서 금강지를 만난 후 그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스승의 조언에 따라 723년부터 727년까지 4년 동안 수마트라와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중앙아시와 서아시아의 40여 개 나라를 여행한 후 중국의 서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당나라로 돌아온 혜초 스님은 금강지와 해후한 후 불교 번역에 충실하다 입적하였으며, 조국인 신라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8세기 신라의 혜초 스님은 배를 타고 왔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예배한 장소가 쿠시나가르였습니다. 이미 폐허가 된 쿠시나가르를 보면서 혜초 스님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한 달 뒤에 쿠시나가르에 도착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이다. 성은 이미 황폐해져서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자리에 탑을 세워 두었는데 스님 한 분이 그곳을 청소하면서 물을 뿌리고 있다. 해마다 팔월 초파일이 되면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도인과 속인들이 탑 있는 곳에 모여 크게 공양을 베푸는 행사를 치른다. 탑이 사방에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매우 거친 숲만이 남아있다. 주위 사방으로 사람이 잘 가지 않는 곳에 거칠게 우거진 숲이 있다. 탑으로 예배를 하러 가는 자들이 무소나 호랑이에게 해를 입기도 한다고 한다.’
혜초보다 한 세기 앞서 중국 당나라 승려 현장이 이곳을 방문하였습니다. 승려 현장은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있는 열반상을 봤는데 그 높이가 200여 장, 즉 600미터가 되었다고 합니다. 7세기 현장이 보고 8세기 혜초가 직접 본 열반탑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고 합니다.
‘이 탑의 서쪽에 강 하나가 있는데, 이라발저 강이라고 한다. 이 강은 남쪽으로 흘러 항하(갠지스강)로 들어간다.’ 『왕오천축국전』
혜초는 석가모니가 입멸하기 전 마지막으로 갔다는 이라발저 강에 대해 기록하면서 이 강이 갠지스강의 지류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앞서 다녀간 중국의 승려 법현이나 현장과는 다른 독창적인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라발저와 히라바띠, 그리고 구시나국처럼 혜초는 현재 지명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음차표기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혜초는 다음 행선지로 피라날사국으로 갔습니다. 지금의 바라나시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가장 먼저 가서 설법한 곳은 인도 바라나시의 녹야원입니다. 녹야원이라 불린 것은 예전에 왕이 사슴을 풀어놓아 살게 했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석가모니의 다섯 제자들이 수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걸어서 이동한 녹야원은 며칠이 걸리는 거리에 있었는데 하루 한 끼씩 먹으며 이동했다고 합니다.
‘며칠 걸려 피라날사국에 이르렀으나, 이 나라 역시 황폐화되어 왕이 없다. 구륜을 비롯한 그 다섯 비구의 소상이 탑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바라나시에 온 혜초는 이후 북쪽의 불교 유적지, 사르나트를 찾아간 것으로 보는데 혜초가 남긴 다섯 비구의 소상이란 표현을 미루어 짐작한 것입니다. 사르나트는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을 한 곳이라고 합니다. 사르나트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34m에 달하는 다메크 스투파가 있었습니다. 석가모니가 다섯 제자들에게 행한 첫 설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6세기 유적입니다. 이 유적에 대해 혜초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석주 위에 사자가 있다. 그 석주는 대단히 커서 다섯 아름이나 되지만 무늬는 섬세하다.’ 『왕오천축국전』
그 때 혜초가 본 사자상은 지금도 인도 화폐 루피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혜초가 찾아갔을 8세기에는 불교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석가모니의 나라 인도에서 그러한 광경을 본 혜초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혜초는 4대 성탑(聖塔)이 있는 마게타국(마가다국)을 들렀습니다. 석가모니는 6년간 고행을 하면서 그것만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중용의 방법으로 깨달음의 방법을 바꾼 장소라고도 합니다. 당시에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은 양대 강국이었습니다.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 왕과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존경했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상가에 대해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두 왕은 서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두 왕의 시절에는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아자타사투르가 아버지인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왕이 되자 두 나라 사이의 평화가 깨집니다. 아자타사투르는 부처님의 사촌인 제바달다와 더불어 부처님을 괴롭힌 왕이기도 합니다. 혜초는 마하보디사원에 도착해서는 그 기쁨을 5언 시에 담아 표현하였습니다. 지금도 마하보디사원은 수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지금도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왕이 세웠다는 높이 52미터의 대탑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탑모양의 사원이라고 합니다. 마하보디사원이 위치한 부다가야는 불교에 있어서 절대적인 성지이지만 지금은 인도가 아닌 이웃 불교국가들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하고 쓴 『왕오천축국전』은 약본이기 때문에 인도의 각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관한 서술이 지극히 간략합니다. 어떤 곳은 지명이나 나라 이름 등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언어 · 풍속 · 정치 등 일반적인 언급도 빈약한 편입니다. 따라서 사료적인 가치만 따지면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나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등에 비하여 떨어진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왕오천축국전』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갖습니다. 첫째, 전술한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海路紀行)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으며 둘째, 전술한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사료입니다.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합니다.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이므로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 · 의상 · 습속 · 산물 · 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섯 천축국의 법에는 목에 칼을 씌우거나 매를 때리는 형벌과 감옥은 없다. 오직 죄인에게는 죄의 무거움에 따라 벌금을 물릴 뿐 사형도 없다.’
‘이곳은 기후가 아주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은 볼 수 없다. 쌀 양식과 떡, 보릿가루, 우유 등을 먹으며, 간장은 없고 소금을 먹는다. 흙으로 구워 만든 냄비에 밥을 익혀 먹지, 무쇠로 만든 가마솥은 없다.’
‘왕이나 벼슬아치, 부자들은 전포로 만든 옷을 입고, 스스로 지어 입는 사람은 한 가지만 입으며, 가난한 사람은 반 조각만 몸에 걸친다.’
혜초가 왜 천축국으로 갔는지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남북국시기의 신라가 왕권강화와 불교 확립을 위해 승려나 유학생을 당나라로 보냈으며 혜초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혜초는 중국의 밀교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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