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 수호신이 된 신라 명신

2023. 10. 29. 07:3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728x90

794년 일본, 도래계혈통으로 알려진 제 50대 천황 간무는 새로운 왕도로 교토를 택합니다. 그리고 이 곳은 1869년 메이지유신으로 도쿄로 천도되기까지 일본의 수도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곳을 지키는 수호신이 바로 신라명신이라는 것입니다. 
7세기초 고대 일본에는 교토 대부호로 하타씨 일족이 있었고 하타 가와가츠는 당시 하타씨 일족의 수장으로 7세기초 일본에 불교를 중흥시킨 쇼토쿠 태자로붜 미륵보살반가상을 하사받아 고류지를 창건했습니다. 하타씨는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집단으로 정치적인 성격은 띠지는 않았지만 고대문명에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교토에는 제일로 꼽히는 니시진오리는 일본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비단으로 이 비단은 하타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5세기 무렵에는 하타씨가 말들었다는 제방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엄청난 시간과 기술을 요구하는 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타씨가 제방을 쌓고 수로를 연결해 일대를 농경지로 개간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하타씨는 선진적인 토목과 관개시설을 사용해 교통의 역사를 100년 정도 앞당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타씨는 신라 울진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와 일본에 정착한 씨족으로 보고 있으나 다른 의견도 존재하는데요. 『신찬성씨록』(815년 편찬된 일본 고대 씨족의 일람서)은 “하타(秦)씨는 진시황제의 3세손인 효무왕에서 나왔고…궁월군(弓月君)이라 칭하는 융통왕이 응신 14년(413년) 127개 현의 백성을 데리고 귀화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진시황’ 운운은 하타(진·秦)씨가 진(秦)과 같은 성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신찬성씨록>이 편찬된 후대에 그렇게 견강부회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일본서기』 응신 14년조를 보면 추론이 가능합니다. 『일본서기』는 “413년 궁월군(弓月君)이 120개 현의 인부를 이끌고 백제로부터 귀화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하타(秦)씨는 진시황의 후예가 아니라 백제계 귀화인인 궁월군의 후예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성씨 중 하타(波多)씨도 백제계 성인 하타(秦)씨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제 망명객이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기쿠치성에서 하타(秦)씨와 관련된 목간이 출토됨으로써 백제와의 관련성을 더욱 높여준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타씨가 모시는 신이 일본천황과 교토를 지키는 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야마나시현이라는 곳에는 운봉사라는 절이 있는데 여기에는 일본 최초로 만들어진 일장기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천황이 일본 최초의 무사로 불리는 미나모토 요리요시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나모토 요리요시는 11세기 빈번하게 일어났던 반란들을 진압한 인물입니다. 그에 따라 황실의 신임이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이 가문에 대해 신라와 연관지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미나모토 요리요시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다른 곳에서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그 중에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이라는 곳도 있었습니다. 하치만궁에서 모시는 것은  하타씨의 신으로 하치만의 본궁은 오이타현에 있었고 그 지역에 하타씨의 왕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5세기 중엽에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건너와 살게 되었고 하타씨는 전국으로 펴져 스무 개가 넘는 씨족으로 나누어 졌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가라시마가 있으며 이들은 우사 하치만신궁에 자신들의 신을 상징하는 동경을 모시고 그와 함께 신여(神輿)를 모셨습니다. 신여는 동경을 운반하는 가마로 1년에 한 번 신여에 동경을 모시고 우사 하치만신궁을 옮겨오는 제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동경이 만들어진 곳은 가와라라고 하며 이곳은 구리산지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만든 사람들을 주목하게 되는데요. 그들은 우사 하치만신궁과 같은 신라의 신을 모시고 뛰어난 제련기술을 보유했던 집단이자 우사의 오이타현에 거주했던 신라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사에는 8세기 초반까지 신라인들이 지방의 큰 호족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중앙으로의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 계기가 생겼으니 바로 도다이지가 745년에 건립된 것입니다. 도다이지는 쇼무천황이 세운 절로 동양최대의 불상이라고 합니다. 높이 16미터, 무게는 무려 425톤으로 제작에만 10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불상의 건립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반대에도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그 때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우사 하치만에서 받은 신탁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아 불상제작에 성공할 수 있었고 도다이지 조성 이후에 하치만신궁은 막강한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미나모토 요시미츠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인물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3남이자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동생. 통칭 '신라사부로'(新羅三郎)라고 합니다. 하지만 요시미츠는 신라사부로라는 통칭과는 달리 신라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합니다.  '신라사부로'라는 통칭은 그가 성인식을 시가현 오쓰시에 있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에서 모시는 신 신라묘진(新羅明神, 신라명신) 앞에서 치러서 붙여진 것입니다.  이 신라묘진은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 남해안을 지나던 중 바람이 불지 않아 위기에 빠졌을 때, 엔닌 일행이 현지 토지신에 빌자 곧 서풍이 불었고, 이 신라 신을 일본에 돌아온 뒤 모신 것으로 신사의 유래 자체는 신라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미나모토 요시미츠는 신라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대신 그가 성인식을 치른 신라선신당은 어떠한 식으로든 신라와 연관성이 있을 것을 보입니다. 

적산서원

신라선신당은 온조지(園城寺) 또는 미이데라(三井寺)로 불리는 천태종 본사인 연력사의 말사로 지증대사(智證大師) 원진(圓珍)이 858년에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배에서 귀국을 도와주며 호법을 약속해준 신라명신을 만났습니다. 이에 신라선신당을 짓게 된 것인데, 신사에서는 신라명신이 스사나오노미코토(素盞嗚命)와 이소타케루노카미(五十猛神)라고 합니다. 이소타케루노카미는 스사나오노미코토의 아들로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이들이 신라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원진은 당나라 유학파로 당나라로 가는 것부터 현지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신라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귀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꿈속에서 신라의 신이 나타나 자신을 모신 절을 지으면 번성하리라는 예언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원진은 돌아와서 미이데라를 세우고 신라의 신인 신라명신을 모셨다고 합니다. 
일본천태종을 개창한 자로 사이초가 있습니다. 그는 803년 간무천황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교토를 떠나 가와라에 도착했으며 가와라신사에서 15개월을 머무르며 안전한 항해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와라와 우사 지역에 모셔진 신라신은 항해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이초은 이곳에 머물면서 신라계 도래인들로부터 해외정보를 습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선박기술이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고 신라의 배를 본뜰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신라인들에 의해 구축해 놓은 해양길을 따라 해외로 나갈 수 있었고 그만큼 신라인들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습니다. 이들이 가져온 물건은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결국 5급 이상의 귀족들만 원하는 물건의 목록을 작성해 관청에 신청하게 했으니 그것이 바로 「매신라물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의 무역네트워크로 사이초는 일본천태종을 창시할 수 있었지만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838년 그의 제자가 천태종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불법을 구하러 떠났으니 그는 바로 옌닌입니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돌아온 엔닌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신라명신을 모시게 되었고 그가 바로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서 받들었던 신라의 신입니다. 그리고 엔닌이 죽은 이후에 제자들은 신라명신을 교토로 옮겨 모시게 되는데 이곳의 이름이 적산선원이라고 합니다. 이후 헤이안후기가 들면서 일본에서 무력을 기반으로 한 무사계급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었고 일본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막부의 초대 수장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신라사부로의 형인 하치만 타로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가문의 수호신인 하치만신은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에 힘입어 국가적인 신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