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무왕

2024. 1. 26. 09:3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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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는 2대 왕은 무왕으로 대조영의 장남이자 건국한 지 불과 30여 년밖에 안 되는 신생국가 발해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의미 있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발해가 당나라를 선제 공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는 동서무역을 통해 경제·사회·문화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발해는 당나라를 침공한 것일까. 
  무왕 대무예에게는 동생 대문예가 있었습니다. 대무예는 대문예에게 흑수말갈을 치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당나라를 친다는 것은 대문예는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흑수말갈을 치면 당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패배를 우려한 대문예는 무왕에게 다시 생각할 것을 권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동생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당나라로 귀화해버렸습니다. 대무예는 당현종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처형하라고 한 것입니다. 당현종은 동생을 귀양보냈다고 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오히려 벼슬을 주었던 것으로 이를 안 발해 무왕은 비난하였습니다.
  한 때 흑수말갈은 발해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722년 당 현종 시기에 스스로 조공하겠다면 당황제를 찾아갑니다. 당 현종은 이를 환대하고 벼슬까지 내립니다. 흑수말갈은 중국 동북부의 여러 말갈족 중 가장 강력한 부족이었습니다. 『신당서』에서는 이들이 거세고 보병전에 강해서 다른 부족에게 위협적이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땋아서 멧돼지의 어금니를 매달고, 꿩의 꼬리깃으로 관을 꾸몄으며, 성질이 잔인하고 사나우며 수렵을 잘한다고 묘사하였습니다. 흑수말갈은 수렵에 능하고 전투력에 강했지만, 물자를 생산할 능력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수나라인 중국이나 고구려를 이어받은 발해로부터 물물교환식으로 식량을 받았습니다. 흑수말갈은 발해와 당나라와 교역함으로써 부족한 물자를 충당해왔지만, 이제는 당나라에 직접 조공을 하면서 발해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당시 다른 말갈족들은 발해에 예속되어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흑수말갈은 그 위험을 미리 차단하려고 그와 같은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계속 접근한 결과 725년에 당은 흑수말갈의 영토에 흑수부를 설치했고 장사라는 관리까지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나라가 직접 흑수말갈을 통치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손을 잡은 것은 발해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해는 이에 직접 항의했지만 당 현종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무왕의 흑수말갈 정벌 계획은 이러한 이유로 세워진 것입니다. 


  당시 발해는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할 만큼, 힘이 강대해지고 있었고 발해의 북쪽으로는 돌궐, 서쪽에는 거란, 그리고 동북지역에는 흑수말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흑수말갈이 당의 편에 선다는 것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왕은 대문예에게 흑수말갈 정복을 명령했지만 대문예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대문예는 일찍이 당나라 수도에 머무른 적이 있어서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왕은 왜 흑수말갈 공격을 명령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당나라 입장에서도 발해를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과 발해 사이에는 돌궐과 거란, 그리고 해족(奚族)이 있었고 이 부족들이 완충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무왕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흑수말갈 공격을 계획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무왕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무왕의 아들이 사망한 것입니다. 왕위 계승자가 죽자 당나라 현종은 태도는 보다 공격적으로 변했습니다.
  ‘경은 당나라의 은혜도 모르고 마침내 나를 배반하려고 한다. 경이 믿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짐은 근래 관용을 품고 중원을 보살펴 왔으나 경이 명을 받들지 않으면 언젠가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구당서』
  발해에서 서해로 가는 유일한 항구 박작구가 있었습니다. 무왕이 박작구에 군사를 집결시켰습니다. 무왕은 장군 장문휴에게 당 정벌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723년 9월, 출격명령이 떨어졌으니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첫 해외 원정이었습니다. 발해의 공격은 바닷길로 이루어졌습니다. 발해 이전의 나라 고구려가 수군을 통해 수나라와 당나라를 물리친 경험이 있던 만큼, 그 전력을 물려받은 발해는 건국된 지 수십 년에 불과했지만, 수군이 강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발해 수군의 공격 목표는 산둥반도의 등주였습니다. 당나라 시기의 등주는 북방 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이자 무역의 거점이었습니다. 수당시기를 거치면서 등주는 남북을 잇는 가장 크고 중요한 무역 항구였고 다른 주변국들도 드나드는 곳이자 당 수군의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배를 출격시킨 곳도 등주였습니다. 발해군의 기습으로 등주성을 지키던 당군은 제대로 대응 한번 못하고 성이 함락됐고, 등주지사 위준은 살해되었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당황하여 신라를 끌어들였습니다. 
  ‘김사란에게 범양과 신라의 군사 10만을 일으켜 발해를 공격케 했다.’ 『신당서』

  나당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신라나 당나라 서로가 관계를 좁힐 기회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이 때 당나라가 먼저 신라 성덕왕의 벼슬까지 높이며 병력을 요청한 것입니다. 당나라 현종은 장수 김윤중을 지목하였는데 그는 삼국 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손자였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당의 요구대로 10만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북상한 신라군은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당은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현종이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왕 무예를 토벌케 하였다.’ 『자치통감』
  대문예가 토벌군의 앞자리에 서며 형은 무왕과 맞서게 된 것입니다. 
  733년 1월, 천진교라는 다리에서 괴한들이 들이닥쳐 대문예를 습격합니다. 이들은 발해 무왕이 보낸 자객들로 이들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낙양 한복판에서 벌인 대담한 시도에 당 현종은 발해의 자객들을 모두 잡아 처형시켰습니다. 이에 무왕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733년, 마도산으로 발해군 진격을 명령합니다. 등주 공격에 이은 2차 정벌이었습니다. 이 때는 무왕 대무예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였습니다. 거란족과 연합해 만리장성 앞 마도산으로 쳐들어간 이 전투에서 당은 군사 1만명이 목숨을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신당서 기록을 보면 “발해 무왕 대무예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고 돼 있습니다. 또 이 전쟁에 참가한 당나라 장수 오승체의 묘비에는 관리와 백성들이 달아났고, 본업을 상실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요충로를 막고 큰 돌로 400리에 걸쳐 막으니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였다.’ 『신당서』
  발해와의 전투에서 두 차례 패한 당나라는 장군 오승체를 마도산에 급파했습니다. 그리고 취한 정책은 정면 대결이 아니라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장벽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당은 발해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고, 발해는 국가적 자신감을 얻어 그에 걸맞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무왕은 중경 서고성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본래 중경은 발해의 첫 수도였던 동모산의 서남쪽 지점에 위치했습니다. 무왕은 서고성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에 대해서 발해가 위급한 상황에서 건국되었고 첫 수도의 위치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지적으로 새 도성을 찾고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현주(중경)라는 것입니다. 이후 발해는 전쟁의 발단이 됐던 흑수말갈 정복을 마무리 짓고 후방을 안정시켰습니다. 
  발해 무왕은 잃어버린 고구려의 고토를 좀 회복했으며 당시 강대국이었던 당나라를 상대로 2차례에 걸쳐 크게 승리로 이끈 정복 군주이자 명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한창 전성기이던 당나라의 본토까지 들어가 싸움을 했음에도 당나라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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