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왜 스스로 미륵이라 했을까.

2024. 5. 13. 07:3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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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는 후삼국시대의 군웅이자 태봉의 유일한 국왕이고 한국사 유일의 승려 출신 군주입니다.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비상했고 삶은 드라마틱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5월 5일 단옷날 이빨을 가진 신라 왕자로 태어납니다. 또 지붕에서 하얀 빛깔이 무지개처럼 하늘 위로 뻗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신이함은 영웅의 탄생을 예고할 때 흔히 쓰는 표현방식입니다. 궁예는 천기를 받고 태어난 신라의 왕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실 궁예가 누구의 아들인지 아직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 학자는 궁예는 헌안왕의 아들이며, 죽이라고 명한 왕은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강릉을 기반으로 한 김주원계의 여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궁예를 왕위쟁탈전의 희생양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 비주류에 속했던 헌안왕은 중앙 정계가 아닌 지방호족과 손을 잡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왕위를 경문왕에게 넘겼습니다. 이때 궁예가 태어났고 이를 눈치 챈 경문왕은 훗날의 정적을 미리 제거하려 한 것입니다.
  궁예가 김주원계와 관련이 있다는 점은 세달사와 명주(강릉) 입성에서 잘 드러납니다. 궁예가 출가한 세달사는 영월 흥교사의 전신입니다. 『삼국유사』‘조신의 꿈’에 따르면 세달사는 김주원계의 장원에 있었고, 단월이 김주원의 4대 후손인 김흔입니다. 그리고 굴산문의 단월 세력인 김주원계는 반신라적 성향을 가지면서도 중앙 정계에 실력자로 참여하고 있었으며, 주위의 여건이 달라지면 언제라도 신라 정부에 등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또 궁예가 세력을 확장할 때, 정벌했다는 의미의 벌(伐), 항복해 왔다는 귀복(歸服), 내투(來投) 등의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명주성은 유일하게 입(入)자를 썼습니다. 입은 영입했다는 의미로 무혈입성을 뜻합니다. 더욱이 궁예는 명주에서 군사를 3500명까지 늘려 장군이라는 칭호를 갖고 태봉 건국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반면 고려시대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궁예가 왕자라는 사실은 다른 데서는 확인되지 않고, 당시에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니, 궁예 혼자만의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경문왕의 아들이라면 그 시기가 비슷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것이고, 경문왕의 딸인 진성여왕 시기에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 시기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경문왕의 서자일지도 모르고 어머니가 해상왕으로 불린 장보고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중앙귀족들에게 배척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궁예가 신라의 왕자라고는 하지만, 궁예가 세력을 일으킨 것은 북원에서 있었던 양길의 반란 세력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보다는 고구려의 영토를 그 기반으로 한 것으로 고구려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국호 역시 후고구려로 정합니다.
  그가 신라의 왕자라는 것도 불명확하고 신라의 왕자였다고 하더라도 단 시간내에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던 것은 두 가지 요인입니다. 첫 번째는 고구려, 백제라는 옛 삼국 유민들이 신라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궁예도 견훤도 나라를 일으킬 수 있었으며 그들은 신라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석사에서 신라왕의 초상을 보고 칼로 쳤으며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인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궁예가 진짜 신라의 대한 적개심을 가졌는지 아니면 그 민심을 이용하려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궁예는 당시 유행하던 미륵신앙을 이용했습니다. 사실 미륵신앙은 경문왕도 왕권의 범위 내에 끌어들이려 했을 만큼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고 외출을 할 때는 금관을 쓰고 비단으로 치장한 백마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소년소녀들에게 깃발과 꽃을 들고 인도하게 하고 승려들에게는 범패를 부르며 따르게 했습니다. 이는 평범한 사람이 누릴 수 없는 화려함과 위엄으로 자신이 특별한 사람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자신이 미륵불임을 내외에 과시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에게 복종하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맏아들은 청광보살, 둘째 아들은 신광보살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아들과 함께 미륵삼존불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세계를 건설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미륵 신앙이란 무엇일까. 미륵 신앙(彌勒信仰)이란 미륵불을 주불로 하는 불교 신앙을 말합니다. 미륵불에 의해 모순된 세상이 바른 세상이 된다는 점 때문에 주로 사회가 혼란할 때 많이 유행하였습니다. 미륵은 범어로 ‘Maitreya’의 음역으로, ‘아직 오지 않은 부처’로 미래불입니다. 불교경전에 따르면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난 후 억압과 고통으로 씨름하는 중생을 구원하러 올 미래불입니다. 
  신라 하대에는 말법사상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불교의 흐름이 시대에 따라서 변하여 달라진다고 보는 사상이 있어서 보통 그 시기를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나눕니다.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때를 말법기라고 하여 논란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말법시대는 백성들이 빈궁하여 절도를 일으키고, 그것을 계기로 살인과 전쟁, 죄악과 배신이 난무하여 자연 인간의 수명까지 단축되는 혼란한 시기입니다. 실제로 신라 말은 말법사상이 유행할 만큼 극심한 혼란기였습니다. 진성여왕 때부터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발발했고, 결국 후삼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혼란한 시기를 끝낼 누군가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미륵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했습니다. 


  궁예는 891년 나라가 혼란해지자, 승려의 옷을 벗어던지고, 반란세력이 가담하였습니다. 기훤의 휘하에 있던 그는 기회를 얻기 위해 양길의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894년 명주 (강릉) 일대를 점령하고 장군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가 양길 휘하에서도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궁예는 인제‧화천‧금화‧철원 등을 차례로 복속해 신라의 동북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896년에 왕륭이 귀순해 왔습니다. 그는 왕건의 아버지이기도 했으며 송악출신인 그였으므로 그의 귀순은 그 지역이 궁예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898년에 패서도와 한산주 관할의 30여 고을을 취하고, 900년에는 충주‧청주‧괴산 등지의 세력까지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발판삼아 901년에 스스로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습니다. 그가 국호를 고려라 한 것은 지지기반이 고구려 지역이었으므로 그들의 힘을 계속 얻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사실 궁예에게 이들의 협조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왕륭 역시 궁예가 강하다는 이유로 조건 없이 귀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륭이 자신의 연고지인 송악에 대한 기득권을 유지하게 해주고, 더욱 강화시킬 것을 약속해야 궁예에게 협력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궁예의 힘이 이 지역에 대해 직접적인 힘을 행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국호를 돌연 마진으로 고칩니다. 아마 궁예가 고구려게 유민들에게 지지를 얻는 것에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중앙집권적인 신라의 관제를 따랐다는 점, 고구려의 중심지인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한 것은 고구려의 옛 지역인 패서지역의 자치 지향적인 호족 세력과 연합을 정리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기반으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왕권을 강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가까운 지역의 주민이 아닌 청주민들을 이주시킵니다. 게다가 청주가 신라의 5소경의 하나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청주 세력이 궁예의 정권 아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911년 궁예는 나라이름을 태봉으로 바꾸고 순군부와 내군이 새로 설치되었는데 순군부는 병부가 군사업무를 독점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왕권에 대한 위협을 예방한 조치로 보였고, 내군의 설치도 순군부 설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궁예의 왕권강화는 미륵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궁예는 더 나아가 ‘미륵관심법’까지 주장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왕권가와에 반대하는 호족과 세력을 숙청하거나 견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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