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문왕

2024. 1. 29. 09:3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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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중국 지린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한 무덤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792년 6월에 36세로, 아버지였던 왕보다 먼저 사망한 발해 정효공주입니다. 그녀는 문왕의 넷째 딸입니다. 여기서 묘지석이 하나 출토됐습니다. 700여 자의 글자 중 491자 만이 식별이 가능합니다.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정효공주의 아버지는 바로 ‘대흥’ 그리고 ‘보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발해 3대왕 문왕입니다.  당시 중국의 황제만이 쓰는 연호를 발해도 독자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발해 문왕은 당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당당히 황제국가라고 외친 것입니다. 발해는 당의 3성 6부라는 중앙제도를 받아들여 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중심이 돼 그 아래에 좌사정과 우사정이라는 이원적 운영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호·예·병·형·공부’의 당나라 6부가 아닌 ‘충·인·의·지·예·신’이라는 유교적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점은 발해 역시 지방정권이 아니라 당과 동등한 국가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실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황제만의 권한으로 대흠무는 스스로 황제임을 칭했습니다. 대흠무는 바로 3대 문왕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발해를 건국한 고왕 대조영(大祚榮)이 699년 천통(天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2대 무왕이 인안(仁安:719~737), 3대 문왕이 대흥(大興:737~793), 5대 성왕이 중흥(中興:794~795), 6대 강왕이 정력(正歷:795~809}, 7대 정왕이 영덕(永德:809~813), 8대 희왕이 주작(朱雀:813~818), 9대 간왕이 태시(太始:818), 10대 선왕이 건흥(建興:818~830)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11대 이진왕(大彛震)의 함화(咸和:830~858)까지 모두 10개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혜공주 묘지명에서 대흠무가 무공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문왕은 즉위 직후부터 아버지 무왕의 뒤를 이어 영토확장에 나섰으며 불열, 월회, 철리 등의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킨 것입니다. 『책부원구』라는 책에는 주변 말갈족들이 당에 바친 조공내역도 기록되어 있는데 발해 문왕이 즉위한 후 불열말갈과 월희말갈 등의 조공이 끊겼습니다. 이는 발해국에 통합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러시아 연해주 중심부에는 우스리스크 남쪽에는 오래된 성터가 남아 잇습니다. 여기서 진흙과 부식토를 10센티미터 두께로 40단을 쌓은 판축토성인데 이곳에서 발해의 땅이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석판에 새겨진 글씨는 수이우빙(SUIUBING)인데 솔빈이라는 발해의 지방 행정구역인 것입니다. 또항 우스리스크 동쪽 200km에도 발해 성터가 발견되었습니다. 니콜라예프카 성터로 여기에 쌓인 옹성이 고구려의 독창적인 축성법으로 쌓아졌습니다. 이곳은 발해 문왕 시기에 활발하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당서에는 발해 문왕이 확보한 땅을 사방 5000리로 고구려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예가 죽자, 그 나라가 사사로이 시호를 무왕이라 하였다.’ 『신당서』
  당나라에서는 발해가 선왕의 시호를 마음대로 정한 것에 불편한 감정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당나라가 먼저 발해를 공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발해의 군사력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에는 발해진이라는 마을이 있어 이 곳이 옛날에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가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발견된 성의 둘레만 16킬로미터로 발해의 성 중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합니다. 756년 아버지 무왕이 중경으로 천도하고 나서 문왕은 수십 년만에 다시 상경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상경성의 규모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수도였던 상경성에 버금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문왕이 아버지 무왕이 세운 수도인 중경을 떠난 것은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왕은 지방을 관리하기 위해 혼인정책으로 결속을 다졌습니다. 문왕의 넷째 딸 정효는 중경 지역의 유력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문왕은 이런 식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긴밀하게 엮어 나갔습니다. 
  문왕 시기에는 당나라와 관계가 비교적 우호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는데 문왕은 자기 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문왕은 나라의 이름을 발해에서 고려(고구려는 5세기 장수왕 시기에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습니다. 고려는 곧 고구려를 의미한다)로 바꾸어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려라는 국호는 일본과 사신 왕래에서 약 20년 정도만 사용해, 정식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정체성만은 잊지 않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일본 헤이안시대의 궁성인 헤이조궁(平城宮) 터에서는 두 점의 목간(木簡)이 발견되었는데, 시대가 앞선 목간에는 발해사(渤海使)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후에 758년에 만든 목간에는 견고려사(遣高麗使)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발해는 758년 9월 양승경을 대표로 한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을 때 국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표현했고 일본에서도 문왕을 고려왕이라고 표현하고 국서를 보내왔습니다. 즉, 당시 대외적으로 발해는 엄연히 독자적인 국가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문왕을 당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발해의 힘이 강해지자, 발해의 황제를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 낮추어 불렀던 당도 762년부터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불렀습니다. 
  문왕은 나라 이름만 고려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역대 임금이 그러했던 것처럼 천손 사상을 주장한 것입니다. 771년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 천손이라고 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舅甥)라고 하여 일본의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천손이라는 것은 곧 천하의 주인은 발해라는 것이고 발해가 일본이 화낼만 한 문장을 넣어 보낸 것은 그만큼 발해의 군사력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또 황제국체제처럼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이란 봉작을 사용했고, 지방 토착세력을 ‘수령’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통일신라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발해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발해 문왕의 재위하던 756년, 발해에 당의 장수가 찾아와 도움을 요청합니다. 안록산의 반란을 일으켜 위기에 빠진 당나라가 발해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이를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추이를 지켜본 발해 문왕의 판단은 맞았습니다. 원군을 요청한 것은 당이 아니라 안록산이었습니다. 1년 뒤에도 당이 또 발해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반란이 수습되어 가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왕은 당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발해는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실리를 챙기려는 것이었습니다. 758년에는 문왕이 일본에 장군 양승경을 파견했는데 일본은 이를 크게 환대했습니다. 그러면서 천황은 그에게 신라 정벌 계획을 직접 설명하며 발해의 원조를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천황의 발해의 사신에게 많은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는데 당시 외교 전례상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문왕은 무관 대신 문관을 사신으로 파견했는데 신라 정벌에 대한 뜻이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발해는 당에 다양한 특산물을 수출했는데 그 중에는 솔빈의 말도 있었습니다. 당나라 상인들 사이에 발해의 말은 명마로서 그 인기가 높았습니다. 말은 전략물자로 활용되었는데 문왕은 이 말을 이정기와 거래했습니다. 패망한 나라 고구려의 유민으로 당의 핍박을 견뎌내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생각을 가지던 인물이었습니다. 발해는 이정기와 공조하는 것은 당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습니다. 이정기는 발해로부터 말을 공급받으면서 발해는 당시 최고 히트 상품인 비단을 얻어갔습니다. 이에 부담을 느낀 당 숙종은 문왕에게 최고위 관직을 계속 수여했으며 어느덧 정1품 사공태위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발해는 일본도와 신라, 당, 거란 등 각국으로 가는 무역로를 확보하며 동아시아의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니 두 딸의 묘비에서 ‘황상’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은 이러한 국력이 바탕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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