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존경받는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

2024. 1. 13. 19:5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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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림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삼국시대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그리고 기림사는 한국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증명한다는 것인데 인도의 정토 불교가 해양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됐고, 자연스럽게 부처님에게 공양하던 차가 유입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학계는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부인해왔으므로 이와 관련하여 기림사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은 그 가장 큰 요인이 우리의 역사가 중국 중심의 역사, 즉 사대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기림사는 인도에서 오신 광유성인께서 임정사를 창건하시고 이 후 643년 선덕여왕 12년에 원효스님께서 기림이라는 이름으로 개창하였다고 합니다. 
  기림사는 2000년 전 바닷길을 통한 정토불교의 유입과 함께 '급수봉다', 즉 물을 길어 차를 우려 성인에게 올리는 헌다문화가 전래된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 출가 후 중국으로 건너가 지장보살로 추앙 받는 김교각 스님(696~794)이 사실은 기림사의 차 종자를 가져가 중국 구화산에 심었다”고 하였습니다. 교각 스님의 차 종자 중국 보급은 신라 흥덕왕 3년(828) 김대렴이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삼국사기 기록보다 109년이나 앞선다고 합니다. 그럼 교각스님은 누구일까. 
  김교각 스님은 통일신라대 신라 왕족 출신의 승려. 중국으로 건너가 오랜 기간 승려로 활동했고 입적 후 지장보살과 동격으로까지 추존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신라 왕실의 사람으로 스님이 되는 것은 그렇게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의상이나 진흥왕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왕이나 왕족이 직접 머리를 깎는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요. 다만 교각스님의 출가 이전의 정체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린 시기에 왕실에서 권력 싸움이 크게 일어났고, 환멸을 느낀 김교각은 당나라로 건너가 지우화산(九華山:구화산)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구제하며 불법을 베풀다가 794년 입적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교각스님은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해 깨달음을 얻게 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과 비슷한 교화활동으로 존경받았으며, 중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신라 김교각 중국 지장왕'으로 추앙받습니다. 
  중국 안후이성의 구화산은 아흔아홉 개의 사찰을 품고 있다는 불교 성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등신불은 입적한 스님의 육신에 금칠이나 옻칠을 하여 불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며 곧 육신보살, 부모가 낳아준 몸 그대로 보살의 지위에 오르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중국 구화산, 그곳에서 최초의 등신불은 바로 김교각 스님이라고 합니다. 


  ‘김교각은 신라 왕자로 김씨 일가다.’ 『화성사기』
  『화성사기』는 비관경이 쓴 책으로 김교각 스님께서 돌아가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쓴 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기록은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후의 기록들도 김교각 스님에 대해 신라 왕족의 친족이라고 하거나 신라 왕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비단옷을 베옷으로 갈아입고 바다 건너 도를 구하려 구화산에 왔네
   본디 나는 신라의 왕자. 수행길에 사모하는 오용지를 만났네.’ -김교각 스님, 수혜미-
  김교각 스님이 직접 썼다는 이 시에서도 그는 신라의 왕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교각 스님이 수행하여 등신불이 된 곳이 바로 구화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화산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등신불이 존재하는 장소인데 해발 1532m의 고지인데다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고 습하다고 합니다. 죽은 육신이 등신불이 되려면 완전하게 건조한 미라의 형태여야 하는데, 이러한 기후의 장소에서 등신불이 된다는 것은 미스테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화산을 등신불의 본고장으로 만든 것이 바로 김교각 스님입니다.     
  ‘김교각의 키는 칠 척(210cm)이었다.’ 『화성사기』
  김교각 스님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유물은 신발로 유일합니다. 엄청나게 큰 짚신 한 켤레로 길이만도 40cm에 이른다고 합니다. 발이 큰 만큼 장정 열 명을 상대할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큰 체구를 가진 김교각 스님이 신라의 왕자였다면 어느 왕의 아들이었을까. 하지만 명확한 해답이 아닌 추측만 할 뿐입니다. 비교적 동시대 인물로 쓴 것으로 김교각 스님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했다고 생각되는 비관경이 쓴 기록물 『화성사기』에서는 김교각 스님이 696년생이라 했으니 그의 출생 시기를 놓고 보면 그의 아버지는 성덕왕일 가능성이 크다고 중국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하기 하니, (당나라)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고 그를 총애하여 조당에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삼국사기』
  ‘왕자 중경을 태자로 삼았다.’ 『삼국사기』, 성덕왕 14년.
  ‘성정왕후를 (궁궐에서) 내보냈다.’ 『삼국사기』 성덕왕, 15년.
  김수충의 어머니가 폐출당하고 『삼국사기』에서는 김수충의 이름이 사라졌기 때문에, 아마 김수충이란 사람이 김교각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교각 스님은 99세 열반에 들었으나 3년이 지나도록 법구가 썩지않고 보존되어 '지장왕보살'로 추앙받고 있다.


  김교각 스님이 중국을 다니면서 10년 만에 이상적인 장소를 찾았으니 바로 구화산입니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화산 정상의 한 동굴에서 수행을 하기 시작했는데, ‘지장 스님이 수도한 옛 동굴’이라는 의미에서 지장고동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작은 동굴로 경전을 갖다놓고 밤낮 수행이 이어졌습니다. 살림이라곤 세 발 달린 솥 하나가 전부였고 끼니는 이 지역에서 나는 흰 흙(고령토)에 약간의 쌀을 섞어 해결했다고 합니다. 김교각 스님과 관련하여 일화도 전해지는데요. 스님이 수행할 적에 독벌레가 쏘았으나 스님은 그래도 수행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한 아름다운 부인이 그에게 예를 드리고 약을 올리며 자신이 몰라보았다며 원컨대 셈을 나올 테니 몸을 보하세요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리고 그 부인이 사라지자 정말로 돌 사이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오니 후에 사람들은 그 부인은 구화산신이라고 불렀고 샘은 용녀천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갈절이라는 사람이 무리를 지어 산을 오르다가 수행을 하는 스님을 보고 크게 놀라 땅 우에 엎드려 스님의 고행은 자신들의 업보 때문이라며 김교각 스님을 위해 절을 지어주니 그 절에 바로 화성사라고 합니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서 석가여래의 부탁을 받고 미륵이 나타나 성도(成道)할 때까지 불(佛)이 없는 세계에 살며 육도(六道)의 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로 알려져 있는데요. 아마 당시 사람들은 ‘지옥의 마지막 중생이 성불하기까지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라는, 지장보살의 마음을 엿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김교각 스님의 고행과 수도가 당나라 황실까지 알려지며 당 황제는 직접 화성사라는 편액을 내렸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었다가 세 해가 지난 뒤 열어보아라. 만일 그 때까지 썩지 않으면 그대로 금칠을 하여라.’
  아흔아홉을 일기로 열반에 들게 된 김교각 스님은 3년이 지난 뒤, 그의 시신이 썩지 않고 열반에 들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았다고 합니다. 이에 제자들은 스님의 욕신에 금칠을 해 석함에 모시고 그 위에 탑을 세워 등신불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김교각 스님은 자기가 부처가 될 수 있어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극락으로 인도하지 않는 한, 자신도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을 한 지도자로 비쳐졌고 지옥에 빠진 마지막 중생도 구제하겠다는 그의 지장사상은 민간의 효사상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김교각 지장보살 이후로 불교에서도 효도를 중시 여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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