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릉 무인상은 정말 서역인인가.

2023. 10. 25. 07:2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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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에 필사된 이븐 쿠르다드비(820~912)의 『도로와 왕국총람』은 “신라에는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가는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해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문헌 속에서도 신라를언급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신라’라고 부르는 땅이 있다. 신라는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다. 그곳에는 금이 아주 많다‘ 『세계 각 나라의 목록(Al Fehrest)』, 이븐 나딤 
‘중국과 가까운 또 하나의 도시는 신라다. 그곳은 강하고 견고하다. 신라의 왕은 매년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 만약 조공을 보내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아 폐허가 될 것이다. 만약 조공을 보내면 이러한 상황은 완전히 변한다’  『갈렙』 타바리(Mohammad Bin Ayub Tabari)
‘중국 영토의 가장 끝에 신라라는 땅이 있다. 무슬림이나 어느 이방인이든 그곳에 가면 정착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다. 유쾌하고 살기에 좋기 때문이다. 많은 금이 거기에서 발견된다.’ 『동물의 자연적 번성』, 마르위지  
 이외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신라에 대해 언급한 기술이 있는데 대부분의 기술은 신라에 대해 유토피아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들은 책을 쓴 아랍인이 직접 신라에 와서 쓴 것은 아닐 것이며 비슷한 내용이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므로 어떠한 내용 하나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아랍인들에게 신라라는 나라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라에는 그와 같은 미술품이 전해져오기도 합니다. 바로 대표적인 것이 원성왕릉 앞에 있는 무인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곱슬머리에 짧은 수염, 큼지막한 매부리코, 무엇보다 머리에 터번을 쓰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신라인으로는 보기 힘듭니다.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무인상을 세운 배경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이런 모습의 무인상이 제작되려면 중앙아시아인이 직접 신라로 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랍에 신라와 관련된 역사 기술이 전해져 오므로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많은 아랍인들이 신라로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해당 기술이 비슷한 것이 많으므로 몇몇 아랍인만이 신라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인상이 제작되었을 시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인상이 조성된 것이 9세기 후반이므로 아마 그 이전에 중앙아시아인이 이곳에 왔을까하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신라는 극심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혼란기에 과연 서역인이 신라에 이익을 생각하고 방문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왔더라도 당에서 얻지 못한 이익을 얻으려 신라로 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요식업, 말 사육 혹은 동물 몰이꾼이거나 보석을 사고 파는 보석감정상, 약재상 같은 장사치일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여기에 왔다면 장사가 목적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의 신분은 높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을 조각하여 왕릉을 지키는 석상으로 재현하게 했을까. 또한 중앙아시아인이 신라의 왕릉을 지켜야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사례가 없습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8세기 전반에는 당의 수도 장안에는 2~3만 명의 중앙아시아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당제국의 군사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당황제의 문무인석에는 서역인을 모델로 한 것이 없습니다. 이는 신라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또한 거론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장입니다. 원성왕릉 무인상의 복식은 소그드인의 전통복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형적인 중국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허리에 차고 있는 둥근주머니나 머리에 두른 띠는 중앙아시아 복장으로 등장하기는 하나 이것만으로 중앙아시아인으로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만약에 해당석상에 중앙아시아인을 강조하려 했다면 그들을 나타내는 확실한 복장표식 예를 들면 호모를 쓰고 호복을 입은 모습으로 재현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앙아시아의 흔적이라고 하는 미술품으로 경주 구정도 방형분 모서리 기둥의 석인상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폴로스틱을 든 중앙아시아인으로 이해하기도 했는데요. 이것은원성왕릉 앞에 있는 무인상과 함께 소그드인이 신라로 유입되었다는 예시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유물 역시 검토한다면 꼭 소그드인이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인물상이 잡은 폴로경기를 하기 위한 스틱, 즉 맬릿으로 보기에는 짧다고 합니다. 봍통 맬릿은 150cm 정도이지만 그 정도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끝이 L자로 꺾여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둔황벽화의 곤륜노가 들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는데 이는 호랑이와 같은 동물들을 조련할 때에 쓰이는 기구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장에 대해 소그드인의 것으로 보았으나 일각에서는 둔황벽화에 보이는 곤륜노로 보기도 합니다. 곤륜노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로 보고 있으며 주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노예이자 때로는 힘으로 사자와 같은 맹수를 제압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구정동 방형분의 석인상은 ‘문수보살이 탄 사자를 이끄는 곤륜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석인상이 새겨져 있는 돌의 다른 한 면에는 사자가 조각되어 있으니 이는 차라리 소그드인보다는 곤륜노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라와 서역 간에 유물이 많지 않은데 그 많지 않은 유물 가운데서도 이들 간에 교류 증거라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원성왕릉 앞에 있는 무인상과 구정동 방형분의 석인상입니다. 하지만 원성왕릉 앞에 있는 무인상과 구정동 방형분의 석인상은 신라와 서역 간의 교류의 흔적으로 단정하기 힘듭니다. 그럼 구정동 방형분의 석인상 또한 소그드인보다는 사자와 곤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성왕릉 앞에 있는 무인상도 신라왕릉의 석물에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신라왕릉 조각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고 합니다. 신라는 당나라와는 달리 능묘조각의 작가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당에는 능묘조각의 수요를 감당할 전담기관이 때로 존재했지만 신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라에서 왕릉 석물 제작이 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돌도 넉넉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불교조각가를 기용해 석인상을 비롯한 석물 제작에 참여토록 했을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원성왕의 경우 불교를 기반으로 왕이 됐고,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는 등 불교와의 관계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으며 만약 원성왕릉의 무인상의 얼굴 모습을 두고 서역인을 직접 모델로 했다고 이야기하려면 감은사 사리기의 사천왕상이나 석굴암 금강역사상을 두고도 서역인이 도래한 결과로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성왕릉의 무인상은 서역인이 아닌 불교 호법신장인 ‘금강역사’을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편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을 서역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경주 계림로 고분에서 나온 『황금보검』, 유리제품 등은  서역과의 교류 근거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경주는 중국을 매개로 동서양과 교류한 중요한 곳으로 보기도 하는데요. 신라에서는 황금보다 유리가 더 귀한 대접을 받았고 5~6세기 신라 사신과 무역상은 이곳에서 지중해의 찬란한 유리제품을 만난 것으로 보았고 8세기 이후에는 서역인이 왔다는 것입니다. 795년 원성왕때 서라벌에 왔다는 '하서국(河西國) 사람'은 서역의 소그드(현재 우즈베키스탄)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최치원의 향악잡영에 나오는 신라 놀이 '속독(束毒)'은 소그드에서 전래한 가면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로마·페르시아 유리기도, 초원 기마민족의 금관도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성왕릉의 무인상도 서역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왕릉의 서역인은 "통일신라의 천하관을 보여주는, 신라중심의 소중화의식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원성왕릉 무인상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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