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시조 조상은 정말 신라인인가.

2023. 4. 4. 09:2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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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왕릉의 전경 지금의 북한지역에 있는 궁예왕릉이 있었다고 일제시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금나라의 시조는 휘(諱)는 함보이고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는데 나이 이미 60여 세였다.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해 뒤를 따르려 하지 않으며 고려에 잔류하면서 말하기를, “후세 자손들은 반드시 서로 모여 만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지 않겠다.”’
이 이야기는 여진족에 세운 금나라의 역사를 다룬 『금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또한 홍호가 기록한 『송막기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라고 불렀는데, 완안은 한언의 왕과 같다.’  『송막기문』
또한 여진의 시조가 신라에서 나왔다는 기록은 더 있습니다. 
‘신록기에서 기록하기를 여진의 시조 감포는 신라로부터 나와 아륵초객으로 달아났다. 돌아갈 곳이 없어 드디어 완안을 의지하였기에 이를 성씨로 삼았다. (중략) 여진의 여러 호걸들과 동맹을 맺고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삼조북맹회편』
여기서 여진의 시조는 감포이며 이는 『금사』에 기록된 함보와 비슷한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에 따르면 금나라 왕족인 완안씨는 신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더 있습니다. 바로 후대인 청나라 대에 쓴 『흠정만주원류고』라는 책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금나라의 시조는 휘가 합부(옛적에는 합모라고 함)이고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 (『통고』와 『대금국지』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본래 신라로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대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요사』와 『금사』 중에서 왕왕 두 나라 호칭이 분별되지 않는다) 사서를 고찰하건대, 신라 임금의 성은 김씨로서 서로 전하기를 수십 대에 이르렀으니 금나라가 신라로부터 나왔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나라를 세우면서 이름도 역시 여기서 취했을 것을 생각된다.’ 『흠정만주원류고』
청나라 대의 역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서도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 출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로부터 왔고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성을 이용했기 때문에 금나라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역사서인 『고려사절요』에서도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평주(황해도의 평산)의 중 금준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시조라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주의 중 금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으로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라고 하며 고을이 활라태사를 낳고 활라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 막내아들을 영가라 하였는데 영가가 제일 영웅호걸스러워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이 지위를 계승하고 오아속이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 『고려사절요』
여기서 보면 우리나라 기록에서는 금나라의 시조를 금준 혹은 금행의 아들 극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중국 측에서 기록한 함보, 합부, 감포와 동일인물이라면 함보, 합부, 감포는 이름이 될 것이며 금준 혹은 금행의 아들 극수라는 글귀를 통해 금나라 왕족의 성씨를 김씨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금과 김은 서로 글자가 통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 기록을 통해 볼 때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해 뒤따르려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볼 때 김함보의 집안은 독실한 불교집안이었으며 어쩌면 신분도 중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국내 학자들은 아고내를 궁예로 보고 있기도 하며 그 동생을 함보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김함보 역시 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명성산에 있는 궁예의 침전바위

진짜 금나라의 시조가 궁예와 관련이 있을까요. 일단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궁예가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으로 빠져나가 도망치다가 부양(강원도 평강)에서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이었고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자처하면서 공포정치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던 궁예치고는 최후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관심법이라는 명목 하에 주변인들을 숙청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데 아마 왕건의 군대는 끝까지 항전하는 궁예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살아있다고 하면 백성들의 마음을 완전히 왕건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궁예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수습하고 새로운 왕조 건설에 열을 올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후 궁예는 국외로 도망쳐 재기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궁예가 항전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근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궁예가 쫓겨난 것은 918년입니다. 그런데 궁예가 철원의 남쪽인 포천으로 내려가 왕건에게 항쟁을 이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곳에 궁예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파주골의 명칭은 경기도 파주시가 아니라 궁예가 왕건의 군대에 패하여 도망친 동네라 하여 패주동이라 불렀다가 시간이 흐르며 파주골이라 불렀으며 근처에 있는 명성산의 명칭의 유래도 왕건의 군대가 명성산을 포위하자 궁예를 비롯한 군사들이 산이 떠나가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해서 울음산을 한자로 표기한 게 바로 명성산이라 하였습니다.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은신하던 곳이라 하며 . 포천에 위치한 또 하나의 명산, 운악산에는 궁예 궁궐터가 있는데 거기서 최후까지 항전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성산에서 탈출한 궁예는 철원 너머 평강, 김화 땅까지 올라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918년 궁예가 쫓겨나고 923년이 되어서 포천 지역의 유력 호족인 성달이 귀부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이 지역의 궁예에 대한 민심이 여전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궁예가 왕건을 피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여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이후 그 후손이 나라를 세운 그것이 바로 금나라요, 건국자는 아골타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합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황실의 성인 아이신기오로(Aisin-gioro)라고 하는데, 여기서 또다른 사실을 끼워맞춥니다. 아이신기오로(Aisin-gioro)가 한자로는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하는데  ‘신라를 잊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조금은 너무 가버린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애신’은 아이신, 즉 황금을 뜻하는 것이고 기로오는 족(族)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각각 다른 단어일 뿐인데 그 두 개를 조합해서 없는 뜻을 찾아낸 것입니다. 과연 금나라는 신라에서 온 것일까. 『금사본기』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초상

‘요나라는 빈철(좋은 철)로 국호를 삼았으니 굳셈을 취한 것이다. 강철이 비록 굳건하나 끝내는 변하고 부서진다. 오직 황금만이 변하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다. 금의 색은 백색이고 우리 왕기얀(Wanggiyan)부도 백색을 숭상한다.’ 『금사본기』
한편 『금사지리지』에서는 아골타 부족이 살던 곳이 송화강의 지류인 아르추카 강이고 이 곳에서 사금이 나오기 때문에 금나라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네이처 지에 청 황실 후예들의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우리나라와 별 관련이 없고 몽골과 관련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직도 어떤 역사학자들은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에서 왔다고 합니다. 지금도 역사에 대한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금나라 왕실의 조상이 신라에서 왔다는 것도 필요에 의해 조작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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