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와 이순신

2023. 1. 24. 19:0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1592년 조선은 전에 없던 위기를 맞습니다. 그것은 바로 임진왜란, 아마 이 전쟁은 조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활약한 장수들과 의병들이 역사교과서에 오르내리고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나 이 전쟁을 치룬 희생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인 건 분명합니다. 그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시기의 조선의 임금이 바로 누구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임금은 누구나 다 아시다시피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였습니다. 
그는 서자 출신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첫 번째 조선 임금이었습니다. 선조는 세자의 책봉과정 혹은 왕위 계승과정에서 원칙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고 따라서 선조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자라서 조선의 임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선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선대 왕인 명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명종에게도 순회세자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명종은 어린 왕손들 중에 후계자를 찾아야 했고 왕은 그들을 교육하는 와중에 익선관을 써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이 아이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를 알아보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다른 왕손들과는 달리 하성군은 제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느냐는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감명받은 명종은 마음속으로 선조를 다음 왕위를 물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1567년 명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후사를 정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즉 후에 선조가 되는 왕손이었습니다. 명종은 이렇듯 다음 왕위계승자를 급하게 정하게 되었는데 명종은 자신이 일찍 세상을 뜰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조에게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일단 이 시기에 임진왜란 일어났는데 그가 의주로 도망쳐버립니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왕이 피난을 떠나는 것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아마 도망치지 않고 한양을 사수하다가 그대로 왜병에게 잡혔다면 그대로 조선의 운명은 끝나는 것이고 그것 역시 엄청난 후대의 비판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피난은 그냥 그대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도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한 술 더떠 요동으로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넘어가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텐데 명나라에서 전쟁 중에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땅으로 넘어오는 것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행동에서는 선조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태를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왕의 권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찌되었던 조선의 승리로 끝난 임진왜란, 이 전쟁을 처리하면서 공신을 책봉하는 과정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도 대신들의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조의 피난길

그럼 임진왜란 중에 활약한 장수로 우리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알려진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인진왜란 중에 이순신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가 높아져 이에 대해 선조가 질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사실 이러한 이순신을 초고속 승진시킨 것은 바로 선조임금입니다.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선조는 종6품 벼슬인 전라북도 정읍의 현감이던 이순신을 일곱계단이나 올려 정 3품 벼슬인 전라좌수사에 임명합니다. 이순신을 추천한 것은 류성룡이기는 하나 단지 그의 추천만으로 파격적인 승진이 이루어질 수 없었고 선조의 결단과 과감성이 한 몫한 것입니다. 당시 대신들의 이순신의 파격승진에 안된다고 하였고 사간원 관리들도 이러한 선조의 정책결정에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나라가 위기에 처한 때에 이순신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한다면 밀어붙인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이순신은 선조의 파격적인 결정 덕분에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이순신은 조정에서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는데 28살 때에는 무과시험을 보다가 시험 중에 낙마하여 낙방했으며 사년 뒤에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습니다. 1587년에는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소탕하고도 모함을 받아 벼슬자리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를 초고속승진시킨 것을 보면 이순신에게 있어 선조는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때까지만 하더라도 말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은 육상에서 연거푸 패전을 거듭했지만 해상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1592년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승전을 알린 조선의 수군은 이후의 왜군과의 바다전투에서 계속 승리하였고 무력화시키면서 수군을 통해 보급품과 병사들을 실어나르려는 왜군의 계획을 좌절시켰습니다. 그리고 한산도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즈음 선조는 이순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순신과 선조는 좋은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리 동구릉 중 조선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 목릉 능침과 석조물 정측면

1597년 일본군은 조선으로 2차 출병을 개시하였습니다. 1592년 당시 일본군은 이순신에게 바다를 빼앗기고 예상치 못한 의병의 출현에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에 일본은 명나라와 담판을 시도했지만 결렬되고 2차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일본은 조선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전라도를 손아귀에 넣을 구상을 하고 그에 따라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으니 그것은 바로 이간질을 이용한 방법입니다. 당시 일본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첩자를 통하여 ‘가토 기요마사 장군이 조만간에 부산진에 상륙할 것이다.’라는 거짓정보를 흘러놓았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에 고니시 입장에서는 가토를 곤경에 빠뜨릴 목적으로 이야기를 흘러보냈고 이를 들은 이순신은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정보는 역시나 조선임금 선조의 귀에 들어갔고 이순신에게 출병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이순신은 믿으려 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가토의 부대는 부산에 상륙했고 선조는 임금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였습니다. 1597년 2월 선조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이유로 처형을 명령했고 조정의 대신들도 이순신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탁 등이 나서서 이순신의 공이 크니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나라를 구한 한 나라의 장수에게 임금의 처형을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전쟁이 정리된 상황이 아닌 전쟁 중에 이러한 처벌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선조가 이순신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 선조는 왜 이순신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적에 선조는 왜군의 침략을 피해 의주까지 피난을 간 상황이었고 이에 반해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전장에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선조에게 실망하였고 이순신의 인기는 높아져만 갔습니다. 이에 선조는 부끄러움과 질투가 한 데 섞여 그러한 판단을 하게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삼군통제사 자리에서 내려온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장군 밑에서 백의종군 생활을 하게 되었고 삼군통제사의 자리는 원균이 이어받았습니다. 이것은 선조의 선택이었는데 이것은 악수가 되었습니다. 원균이 이끄는 수군은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대패하고 만 것입니다. 이 전투로 인해 조선의 함대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는데 당시 선조는 해상에서의 전투는 불리하니 육지에서 힘쓰라고 이순신에게 말합니다. 이에 이순신은 역사의 길이 남을 말, ‘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말과 함께 조선의 수군을 이끌었고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은 그 공을 인정받아 ‘선무 일등 공신’에 임명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원균도 이름을 올렸는데 아마 선조는 끝끝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임진왜란 최고의 소방수 이순신은 선조에게만큼은 인정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