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의 설계자 한명회

2023. 1. 15. 18:3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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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10월 10일 밤 조선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수양대군이 자신들의 무사를 데리고 당시 좌의정이던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머리를 쇠몽둥이로 가격해 죽인 것입니다. 그럼 수양대군은 누구인가. 그는 세종의 둘째아들로 그의 형은 문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카는 당시 조선의 왕인 단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왜 김종서를 죽였을까. 그의 죄목은 바로 역모죄였습니다. 그리고 김종서와 같은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궁으로 불러 죽였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그럼 과연 김종서는 역모죄를 꾸미고 있었을까. 그는 세종 대에 명을 받들어 6진을 개척한 인물로 태종대에 관직에 진출하여 세종, 문종, 단종 때까지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세종은 우리나라 역대 성군으로 31년 6개월 동안 조선의 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아들 문종이 병약했다는 사실입니다. 세종은 이것이 마음에 걸려 집현전학자들에게 문종과 제 6대 왕이 될 자신의 손자까지 잘 보살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세종의 짐작대로 문종은 왕이 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어 왕이 된 것이 바로 12살의 단종입니다. 당시 할아버지,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없는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안타까워 문종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불러 어린 임금을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럼 김종서는 그와 같은 기대에 부응했을까. 

이후 김종서는 권력을 잡고 마음대로 휘둘렀다고 합니다. 자기 집의 별실을 지으면서 목재와 기와, 철재와 석재를 모두 조정의 공사를 관장하는 관리에게서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들어가는 뇌물도 많았으며 실록에는 안평대군에게 시를 보내 모반을 일으킬 것을 권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또한 국정을 운영할 때에는 신하들이 미리 황색표시를 해두고 단종이 이를 형식적으로 낙점하는 황표정사로 권력을 누렸습니다. 이에 당연히 왕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왕실의 친척들은 좋게 볼리 없었습니다. 그 중 이 상황에 대해 크게 분노한 사람은 바로 수양대군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형 문종은 수양대군더러 정대하고 충성하고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다르다하여 항상 더불어 일을 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진법을 만들자 문종은 그에게 이정, 제갈량인들 어찌 수양보다 나을까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수양은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권력욕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김종서와 황보인들을 제거하는 등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수양대군에게는 거사가 일으킬 때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한명회였습니다. 수양대군을 만나기 전까지 한명회는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관리를 지내긴 했지만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홀로 자라야 했고 커서 큰 뜻을 품고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어려서 같이 공부하던 권람과 함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전국을 유람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벼슬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음직으로 개성의 경덕궁 지킴이 자리에서 말단관리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큰 뜻을 품고 있던 한명회에게 안타까운 행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친구 권람가 다리가 되어 수양대군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명회를 만난 수양대군의 그의 지략과 머리에 뛰어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날로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그럼 수양대군의 상황은 어떠했길래 한명회를 받아들였을까. 그는 단종의 숙부였고 세종의 남은 아들 중에는 가장 연장자였습니다. 그는 정치적 야망이 컸고 따라서 단종을 보필하는 대신들의 견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김종서 등이 황표정사 등으로 막대한 권력을 누리는 사이 단종과 대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안평대군이 김종서와 손을 잡으며 수양대군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양대군은 자신을 도와줄 책사가 필요했고 그리하여 한명회를 만난 것입니다. 
계유정난 당시 한명회가 살생부를 준비하고 그에 따라 안평대군의 편에 섰던 대신들은 모조리 학살당했습니다. 명단뿐만 아니라 제거방법까지 기획되었는데 심지어 살생부에 기록되었으나 궁에 들어오지 못한 대신들은 병사들을 자택으로 보내 학살했습니다. 당시 이 일을 안평대군이 일으킨 난을 수양대군이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했다는 의미로 기록하긴 했지만 사실상 이것은 승자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일로 한명회는 일등공신으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궁지기에 불과했으나 그의 위상은 수직상승된 것입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압박하여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7대왕인 세조로 등극합니다. 당시 임금의 도장인 옥새를 전달할 때에 집현전 학자인 성삼문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후 집현전 학자들과 세조와의 갈등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계유정난 당시 집현전 학자들이 적극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입을 다무는 것으로 동의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도 일부 대신들이 권세를 잡고 흔드는 것이 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현전 학자들이 수양대군에게 조금씩 반감을 산 것은 바로 그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쿠데타 뒤에는 이것을 바로 잡겠다고 하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바로 단종복위세력이 꿈틀되고 있던 것입니다. 1456년 6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세조의 집권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모여 거사를 논의했습니다. 왕의 호위무사인 성승과 유응부가 세조와 그 측근세력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것은 바로 한명회였습니다. 그들이 거사하기로 한 날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사신 접대장소가 좁다고 하며 유응부와 성승부의 출입을 막은 것입니다. 이로써 단종복위계획은 미뤄지게 되었는데 그 사이 배신자가 밀고하는 바람에 단종복위계획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잡혀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고문이 가해졌고 그렇게 단종복위계획한 신하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세조를 임금이라 부르지 않고 나리라고 불렀습니다. 박팽년도 마찬가지였는데 화가 난 세조가 자신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녹을 받아먹었느냐고 묻자 박팽년은 그 녹은 집에 그대로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집을 조사하니 세조가 준 곡식이 고스란히 있었습니다. 이에 세조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자결한 한 사람을 제외하고 처형하니 그들을 사육신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공을 세운 한명회는 좌부승지에서 도승지로 승진하였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세조의 광릉

그럼 세조가 집권하고 한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였습니다. 의정부서사제는 중앙행정 관청인 육조에서 올린 여러 안을 영의정과 좌의정 등의 재상들이 모여 의논하고 이를 다시 왕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의정부의 권한의 강화되었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세조는 육조직계제를 실시, 육조에서 바로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집현전을 폐지하고 그에 따른 경연제도도 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공신에 책봉하며 요직을 앉혀 이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갔습니다. 바로 한명회를 비롯한 신숙주, 정창손 등이었습니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비판의 소지가 많은 세조이지만 왕이 되고나서는 상당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여진족을 토벌하고 『경국대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조실록』에서는 당시를 태평성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향토방위개념에 기초한 이른바 진관체제라는 방위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대규모 사민정책과 토지개간사업을 추진하여 농업진흥을 꾀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대한 제사를 복원하고 많은 편찬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조가 있게 한 것이 바로 한명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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