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강국 조선을 만든 세종과 장영실

2023. 1. 23. 19:0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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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조선의 4대 임금으로 우리 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도 했지만 당시 조선은 과학분야에서도 정점을 찍고 있었고 이러한 과학강국 조선에 크게 기여한 학자 중의 하나가 바로 장영실입니다. 우리나라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인데 지폐의 면면을 살펴보면 측우기라던가 혼천의같은 과학과 과련된 기구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세종대왕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세종대왕은 자신의 머릿속에 과학강국 조선을 그리고 있었고 장영실을 비롯한 여러 조선의 과학자들을 통해 실현시킨 것입니다. 
그럼 장영실은 어떤 사람일까. 장영실은 아버지가 원나라 사람이고 어머니가 기생이라고 합니다. 특히 장영실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는데 기록에서는 조선의 태종도 이를 알고 보호하고 세종 역시 아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종 이전에 태종이 먼저 장영실을 발탁한 것입니다. 한편 아산 장씨의 족보에서는 장영실에 대해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이 아니라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후 한반도에 뿌리내린 귀화인의 후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영실의 어머니가 노비출신이었고 당시 사회의 관습에 따라 장영실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천민의 신분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장영실은 어려서 경상도 동래현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남달라 부서진 농기구를 곧잘 고쳤으며 생각지도 못한 기구를 만들어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경상도 관찰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그의 추천으로 동래에서 한양으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손재주가 세종의 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고심하던 세종대왕은 궁중기술자로 장영실을 받아들였졌다고 하지만 사서의 기록을 따르면 이미 태종 대에 궁궐에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던 1421년 장영실은 명나라에 유학가게 되었고 그곳에의 천문기기를 살핀 후 천문학 관력서적을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해당 나라에서 중요한 기술비밀이 담긴 책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았는데 장영실은 중요한 임무를 띠고 이 서적을 갖고 돌아온 것입니다. 당시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느냐면 세종은 이를 중요하게 여겨 장영실을 승진시켰습니다. 
조선사회는 당시 신분질서가 철저하게 지켜지던 사회였습니다. 아무리 왕이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천민에게 벼슬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그 의견을 물었습니다. 상의원은 임금의 옷을 짓고 궁정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고, 별좌는 종 5품 혹은 정 5품에 해당하는 벼슬이었습니다. 이에 관리의 임명과 승진문제에 관여하는 이조판서 허조는 장영실이 본래 기생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하지만 병조판서는 그런 사람일수록 더욱 등용시켜야 한다고 의견을 밝히며 공조관리의 말을 빌어 장영실이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천민출신에게 일을 맡기고 높은 벼슬을 주어 노비신분에서 해방시키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친 것입니다. 
우리 역사상 여러 콤비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거론될 수 있는 사례가 바로 세종대왕과 장영실로 이 둘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세종은 백성들을 위해 민본주의를 펼쳤고 이러한 그의 정책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당시 산업의 근간이던 농업을 잘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과 밀접한 관련한 기상관측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작업으로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1433년에 천체의 위치나 움직임 등을 살필 수 있는 간의와 혼천의를 만들었습니다. 혼천의를 이용하면 절기에 따른 태양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발명은 세종대왕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왕도정치와 민본주의에 가까운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1433년에는 물시계 자격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장영실이 만든 시계를 조선최초의 표준시계로 지정한 것입니다. 이 자격루는 물의 흐름과 인형을 이용하여 정확한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거대한 물시계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물시계는 원나라 순제 때에도 있었지만 장영실이 만든 것이 더욱 정밀하다고 세종은 말했습니다. 특히 이러한 자동물시계의 발명으로 사람이 때에 맞추어 시간을 알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밤낮으로 물시계를 보다가 알려주는 것이어서 밤에는 졸았다가 미처 시간을 알려주지 못해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수표를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벼슬자리는 종3품 대호군으로, 수표 제작 이후에는 정3품 상호군으로 올랐습니다. 장영실이 이루어낸 조선 초기의 발명품들은 중국 중심에서 벗어나 우리의 기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우리만의 관측기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한 앙부일구라는 해시계도 제작하였습니다. 가마솥처럼 오목한 반원구 모양에 해의 위치에 따라 그림자의 방향과 길이가 달라지는 것을 이용하여 시계를 만든 것입니다.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仰釜日晷)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놓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놓았다."('세종실록' 세종 19년(1437년) 4월15일)

이러한 앙부일구가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 시계는 청계천이 시작되는 혜정교와 종묘 남쪽거리에 두었는데 이는 백성들을 위해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442년 이후 기록에서 장영실은 사라졌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 해에 장영실은 세종이 온천여행에 갈 때 타고 갈 가마를 제작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한 달이 더 지나서 완성된 가마, 그런데 시험운전을 하던 날,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이 일로 장영실은 곤장 백대형을 선고받고 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세종은 장영실을 총애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작 곤장은 20대를 줄인 80대를 선고하는 외에 이렇다할 보호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시험운전이었으니 임금을 모시고 가다가 사고가 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세종이 장영실 등의 죄를 황희에게 의논하게 하여 여러 사람들이 장영실의 죄를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을 낸 것입니다. 그리고 세종은 그 지시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곤장 80대를 맞았을 장영실, 아마 그는 80대를 고스란히 다 맞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욱 의이한 것은 이후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그의 흔적은 역사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이에 장영실이 부실 제작으로 가마가 부서졌다는 설, 사대모화주의자들에 의해 가마의 부품을 몇 개 빼내어 가마를 부서지게 했다는 설 등이 나왔습니다. 
한편 장영실이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앙부일구는 조선후기까지도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2019년 조선후기 때 제작된 앙부일구 1점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미국에서 열린 경매를 통해 구입한 것입니다. 이 앙부일구는 조선 1713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앙부일구로, 지름 24.1㎝, 높이 11.7㎝, 약 4.5㎏의 무게를 지닌 금속제 유물입니다. 이 앙부일구는 정확한 시간과 계절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정밀한 주조기법과 섬세한 은입사기법, 그리고 다리의 용과 거북머리의 뛰어난 장식요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영실이 제작에 참여했을 조선 초기에 제작된 앙부일구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영실은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와 같은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장영실의 매형이 집현전 출신의 천문학자인 김담이라고 하며 그를 통해 천문학과 수학을 접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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