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를 도운 조선의 창업자 정도전
2023. 1. 25. 19:1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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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7월 고려의 제 34대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것은 왕씨가문의 후손이 아닌 당대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성계였습니다. 그리고 고려왕이 된 이성계는 1393년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고치고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깁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힘만으로 나라를 창업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성계의 조력자로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정도전입니다. 특히 그가 한 말이 정도전 자신이 얼마나 조선 창업에 큰 힘이 되었는지 그 자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유방이 장자방(장양의 자)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 유방을 쓴 것이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나라를 세웠다는 의미로 정도전이 술에 취할 때마다 하는 소리였습니다. 정도전이 왜 이와 같은 말을 했을까. 아마도 조선의 창업에도 그가 한나라의 건국에 도움을 준 장자방만큼이나 공이 컸다는 것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가 술을 먹으면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383년 어느 가을날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났습니다. 그는 당시 함경도 함흥에 있던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이만한 군사들로 무엇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정도전은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성계에게 아무리 왜구가 쳐들어온다 해도 막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답을 듣고도 정도전이 그 정확한 의미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성계는 떠오르는 신흥무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인으로 원나라 간섭기에 관리로 있다가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의 편에서 도움을 준 인물이었습니다. 그 공로로 고려로부터 벼슬을 받아 해당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고 아들 이성계도 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며 고려의 국방에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특히 황산대첩에서의 승리로 고려 백성들의 희망으로 떠올랐으며 그의 밑으로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들 중에는 당시 신진사대부라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도전도 신진사대부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정도전은 1342년에 충청도 단양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이란 사람으로 청백리였지만 벼슬로 크게 오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정도전은 성균관시험에 붙어 정몽주와 함께 이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성균관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 원나라와 명나라가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절친인 정몽주와 함께 친명파를 견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나라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친원파인 재상 이인임과 경복흥이 정도전에게 사신을 맞이하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이 일로 친명파 몇 명과 함께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정몽주는 복직되어 일본에 가서 큰 공을 세웠으나 정도전은 공부에 전념하며 한양으로 올라와서는 삼각산 밑에 삼봉재라는 집을 짓고는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처를 부평으로 또다시 김포로 옮겨야 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벼슬이 작았던 데다가 그의 어머니가 노비출신의 딸이어서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정도전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 사람들의 시기를 샀습니다.
그런 그가 어떤 장수가 버티던 진영에서 소나무의 껍질에다가 이러한 시를 적어넣었습니다.
오랜 세월 버티어 온 한 그루 소나무여/ 청산에 태어나 자라 몇만 겹인가/ 좋았던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묵은 흔적뿐이구나.
이후로 이성계와 정도전을 뜻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성계의 도움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도전은 조정의 핵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조정파는 정도전의 급진파와 정몽주의 온건파로 나뉘어져 있었고 급진파가 온건파에 비해 다소 세력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해도 해주에서 이성계가 말을 타다가 떨어져 부상을 당해 눕게 되자 정몽주는 이 틈을 타 정도전과 조준을 상소를 통해 유배 보내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방원이 나서 정몽주를 제거하고 이성계가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392년에 조선이 개국되었을 때 정도전은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장대로 새 나라의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궁궐의 위치, 지금 알려진 성문의 이름까지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경국전』이라는 법전을 펴냈으며 『고려국사』를 펴내어 전왕조의 역사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도전이 꿈꾸는 것은 바로 재상에 의한 정치였습니다. 재상은 여러 직책을 겸임하지만 왕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택하는 것뿐이며 그밖의 모든 정사에는 간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은 재상을 뽑고 그 재상이 일을 잘못하면 재상을 바꾸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을 맡은 재상은 자신의 정치색에 맡은 인재로 조정을 구성하여 나랏일을 이끄는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내각책임제와 비슷한 것입니다. 그는 임금과 신하 간의 세력균형을 꿈꾸었으며 임금이 포악하더라도 함부로 바꿀 수 없고 그에 피해는 다 백성들이 감내해야 하지만 신하들이 잘못할 경우 바꾸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탐탁치 않아했던 것은 바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원과 더불어 정도전에 대해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명나라였습니다. 명나라는 중국황실에 올린 표전문에 명나라를 깔보는 글귀가 있다면 이를 문제삼고 글을 지은 사람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도전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생각들이 명나라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는 요동도 본래 조선의 땅이니 언젠가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주원장은 정도전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도 조선에서 군사훈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명나라 사신도 더 이상 크게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큰 위기는 바로 이방원과의 갈등이었습니다.
이성계는 당시 11살이던 막내아들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사실 조선의 건국에서 이방원의 공이 컸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워낙에 희생이 컸고 이성계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것에 대해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는 다음 왕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어진 사람이 왕이 되기를 원했고 그리하여 방석을 세자로 내세웠으나 이방원은 어린 세자가 왕이 되면 공신들이 이 틈을 타 권력을 쥐고 흔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즈음 정도전은 왕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병을 혁파하여 나라의 군대로 흡수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왕자들이 반발하였고 그 중에는 이방원의 형 방간도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몸이 아파 자리에 눕던 어느 날 정도전은 왕자들을 밤에 불렀습니다. 이방원은 대궐로 갔다가 변소에 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궁궐문은 밤마다 등불을 켜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꺼져 있는데 이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함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이 부하를 통해 사실임을 알게 되고 이방원은 반격에 나서 정도전제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러한 사실을 꾸몄다면 이는 반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바람대로 왕자들이 대궐으로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사의 호위 없이 한가하게 남은의 집에서 술을 먹다가 죽은 것입니다. 당시 정도전은 삼군부의 우두머리로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는데 별 저항 없이 죽었다는 것은 그가 난을 꾸몄다는 것이 말이 안되었습니다.
재상정치를 주장하며 이성계를 도우며 조선을 창업한 정도전, 그는 왜 당시 최영장군이 아닌 이성계를 택했을까. 당시 최영장군은 개인적으로 청렴했지만 반개혁파를 지지하지 않았고 또한 신진사대부들에게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성계를 선택한 정도전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잤지만 창업한 나라의 왕의 왕자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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