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온실이 있었다.

2023. 1. 4. 08:2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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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月開花出於人爲子(동월개화출어인위자).
“겨울 달에 핀 꽃은 인위(人爲)에서 나온 것이다.” 『성종실록』
1471년 1월의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궁에는 꽃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장원서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키운 영산홍을 바치자 왕은 풀과 나무는 천지의 기운을 받고 자라는 것으로서 그 시기가 있는데 제 때에 피지 않은 것은 인위적인 것으로 자신의 취향과 다르다 하여 바치지 말라고 한였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 임금의 취향이 아니라 바로 한 겨울에 꽃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겨울에도 꽃과 작물이 가능한 시대였지만 먼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1471년 즉, 15세기의 기록이니 서양에서 온실을 사용했다는 독일의 기록에 1619년보다 훨씬 앞선 것입니다. 과연 조선에서 한겨울에 화초를 재배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을까.  
그에 대한 비밀은 『산가요록』이라는 책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산가요록>은 조선 세종~세조 시절 어의로 있었던 전순의가 1450년 무렵 편찬한 종합농서로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종합농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농사직설』을 포함한 여러 농사들이 있지만 식량작물을 포함하여 채소와 과수·식품까지 망라한 것은 『산가요록』이 최초입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농사법과 함께 68가지 술 빚는 방법과 장 담그는 법, 그리고 식초만들기 등 조리법과 식품 저장법 등 275가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동절양채(冬節養菜)편이 있는데 여기서는 겨울철 채소를 생산한 온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삼면축폐(三面築蔽),  동서북 삼면에 벽을 쌓고 
조돌물령연생 (造堗勿令煙生) 바닥에는 구들을 놓되 연기가 나지 않도록 하며  
도지유지(塗紙油之) 남면개작전창(南面皆作箭窓) 기름종이를 바른 살창을 햇빛이 잘 드는 남쪽면에 설치한다. 
동살적토일척반 구들 위에 흙을 한자 반 (45cm) 정도 쌓고 온실 옆에 부뚝막을 설치 가마솥의 수증기를 이용해 온실의 습도를 조절한다.‘


즉, 조선시대에도 온실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온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있어야 할까. 그것은 난방, 가습, 채광이었습니다. 현대의 온실은 유럽에서 전해진 것인데 이것은 난로로 데운 공기를 안으로 불어넣어 온실 안의 공기를 데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땅을 따뜻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식물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근에는 땅에 난방파이프를 설치하여 뿌리가 미치는 흙의 온도를 높인다고 합니다. 
‘토우에서 겨울에 시금치를 기르게 하다’ 『조선왕조실록』
실록에 이러한 내용이 나왔을 때 후대의 사람들이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시금치를 겨울에 재배할 수 있다는 기록은 아무래도 의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여러 옛날 책속에서 『산가요록』이 발견되며 그 해답이 풀린 것입니다. 
위에서 온실의 조건으로 난방, 가습, 채광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럼 과연 조선의 온실은 이러한 조건들을 얼마나 충족하고 있었을까. 우리조상들이 사용한 온돌로 난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온돌로 흙의 온도를 23℃로 유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난방은 땅의 아래부분까지 따뜻하게 해주었고 식물 뿌리 발육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식물에게도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온실같은 경우 땅을 따뜻하게 하지 못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분이나 다른 재배시설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이 때 아궁이에 가마솥을 얹어 수증기를 온실 안으로 들여보내 습도도 높였습니다. 


그럼 가습과 채광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여기서 사용된 것이 바로 기름칠한 종이였습니다. 현대에는 비닐하우스를 사용하는데 이 때 사용된 비닐보다 기름을 먹인 한지의 인장강도가 더 세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들이치는 빗물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럼 기름먹인 한지와 일반 한지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한지는 긴 섬유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를 공기가 메우고 있습니다. 한지는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물을 만나면 잘 찢어집니다. 하지만 기름을 먹이면 공기가 있던 공간을 기름이 대신하게 되고 이것이 물이 통과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리하여 일반한지가 물에 닿아도 찢어지지만 기름을 먹인 한지는 물에 대하여 방수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름을 먹은 한지는 작물에 이슬이 맺히지 않도록 조절합니다. 온실은 따뜻한 공간이지만 그 용도는 주로 추울 때 사용되는 것으로 바깥과 온도 차이가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오전에는 이러한 온도차이로 온실 내부에 이슬이 맺히는데 이것이 작물에 떨어지면 오전햇빛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한다고 합니다. 또한 오전의 햇빛은 광합성 촉진과 온도 상승에 역할을 하므로 이슬이 맺히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의 온실에는 기름먹은 한지가 해결합니다. 기름먹은 한지는 액체상태의 물은 통과시키지 못하지만 기체상태의 물은 통과시키기 때문입니다. 방수효과와 이슬맺힘방지효과를 지닌 기름먹인 한지의 효과는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름먹인 한지는 일반 한지에 비해 많은 빛을 투과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섬유질 사이의 기름이 빛의 굴절률을 섬유와 비슷하게 만들고 이는 마치 유리를 통해 빛을 통과하는 효과를 냅니다. 따라서 기름먹은 한지는 보온효과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인장강도가 세니 이것은 두고두고 쓸 수 있는 재료입니다. 
조선 시대 궁중의 꽃과 나무를 관장하던 ‘장원서’라는 관청이 있었습니다. 실록에는 장원서에서 꽃과 과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궁중행사가 벌어지면 꽃이 쓰일테고 아마 장원서에서는 이 때 쓰일 꽃을 생산하기 위해 온실을 지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감귤은 다양하게 활용되었는데 왕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제향을 포함한 여러 제사에 사용되었으며 신하에게 하사되었고 성균관 유생에게 감귤을 나눠주고 치르는 과거시험 황감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감귤은 한약재로 쓰였는데 이러한 감귤은 수요량에 비해 생산량이 부족해 귀한 것이었고 생산되다하더라도 오다가 풍랑을 만나 소실되거나 한양에 오더라도 부패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귤나무가 잘 사는지 시험하기 위해 경루에 집을 짓고 담을 쌓는다. 그리고 온돌을 만든다.’
『세종실록』
아마 이때 온실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용대비 효용이 떨어져 감귤의 재배실험은 중단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험은 아마 실생활에서 활용된 온돌에서 착안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1418~1450)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1433년)에는 세종이 궁궐 내의 전용 찜질방을 자주 애용했고, 백성들을 위한 찜질방인 한증소를 도성에 설치하고 한의사를 배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종대왕 자신도 왕실 후원에 밭을 만들고 경작을 했다고 하니 농업진흥을 위해 세종대왕은 고민했을 것이고 그러한 생각 끝에 온돌과 기름먹인 한지를 결합한 조선시대 온실이 등장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친환경적인 세계 최초의 온실은 그 기술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사라져버렸습니다. ‘귤나무를 심은 것은 생장여부 확인 시험이었습니다. 귤나무 보호를 위해 가을에는 집을 짓고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듭니다. 봄에는 도로 이를 무너뜨립니다. 그 폐해가 한이 없습니다. 귤나무가 거의 10척이나 되기에 집 짓는 데 쓰는 긴 나무 준비도 어렵습니다. ’
왜 기술이 후대에 전해지지 못했을까.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추측해본다면 여기서 재배된 작물이 대부분 궁중에서 소비되다 보니 민본주의사상에 어긋난다고 하여 이러한 온실의 운영은 백성들의 고생을 무시한 처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가뭄과 기근이 찾아오면 온실은 운영할 수 없었고 소수만 알고 있던 기술의 비법이 잊혀져 있다가 근래에 들어 밝혀진 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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