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 져버린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

2023. 1. 3. 08:2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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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께서 벼슬을 한지 3년인데 세상 풍기가 많이 변했습니다. 청탁하는 것, 뇌물 주는 관행이 끊어졌으니 대감을 노리는 자들이 많을 겁니다.’
이 대감은 바로 조광조입니다. 벽초 홍명희가 쓴 소설 『임꺽정』의 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 이후 조광조는 유배를 갑니다. 이에 선비들이 반발합니다. 당시 조광조는 개혁의 아이콘으로 여겨졌으므로 당시 조광조의 유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조광조가 개혁정치의 핵심으로 생각한 것은 언로통색론(말길이 통하면 흥하고 막히면 망한다.), 즉 언로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벼슬직에 나아가 처음 맡았던 자리는 언관의 자리로 이 자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벼슬직에 처음 나아가 맡았던 자리이니만큼 임금에게 간언하는 벼슬이 형식상 자리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주장을 면전에서 비판하는 것을 ‘면절’, 임금의 잘못을 궁궐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정쟁’, 임금의 잘못을 따지면서 난간을 부러뜨리는 것을 ‘절함’이라 했으니 생각보다 언관의 자리를 그 대응방식이 과격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는 면책특권이 보장되었습니다. 
조광조는 자신의 직속상관의 파직을 요구했습니다. 151년 장경황후가 죽자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등이 연산군 처남 딸이라는 이유로 폐비시킨 신비복위 등을 상소합니다. 이에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세력에 의해 김정 등이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기언수약과당 불용이이 하부죄지(其言雖若過當 不用而已 何復罪之)’
‘그 말이 지나치다 해도 쓰지 않으면 그만인데 어찌하여 그들에게 죄를 주는 것인가.’ 

상소자 처벌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오히려 상소자 처벌에 앞장선 관료들을 파직해 달라는 삼인대 상소사건의 재심을 요구합니다. 옳은 말을 한 신하들을 벌 주라는 대간들과는 같이 일을 못하겠으니 그들을 파직하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고 하였으며 이 일로 사간원의 간부들을 전원 파직합니다. 그럼 왜 중종은 조광조의 의견을 수렴하여 사간원 간부들을 몰아냈을까. 중종은 반정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른 바 중종반정, 이 일은 연산군의 폭정이 원인이 되어 발생되었으며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燕山君)을 폐위시키고 중종[조선](中宗)을 옹립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정세력이 이른바 공신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중종은 이에 휘둘렸습니다. 연산군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한 세력이 오히려 중종반정을 계기로 부패세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차례로 죽었으며 반정 때 핵심무장으로 활약했던 신윤무와 박영문도 반역으로 몰려 사사되었습니다. 핵심공신세력이 사라지자 중종은 자신의 뜻을 펼치길 원했고 인재를 원했던 중종에게 조광조가 눈에 띄인 것입니다. 
이러한 조광조는 소격서 폐지를 요구합니다. 소격서라는 곳은 도교양식의 제사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조광조와 신진들은 도교를 세상을 속이고 더럽히는 이단의 도로 보고 폐지를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데 제후국의 왕인 조선의 왕이 행하는 것은 어긋난다는 논리였습니다. 중종은 조선의 건국 이래 계속해 오던 것이므로 거절합니다. 하지만 소격서의 혁파를 계속 주장하자 중종은 그 뜻을 받아들였지만 사실 이 때부터 중종과 조광조 사이에는 틈이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중종을 지치게 한 것은 경연이었습니다. 경연은 본래 학문을 토론하는 자리이지만 정치 현안에 대한 이야기나 앞으로 국정에서 중요하게 해야 할 일, 또 왕으로서 처신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논의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아침, 점심, 저녁은 물론, 밤에 하는 야대도 있었으니 조광조는 특히 경연을 중시했고 중종은 이에 지켜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경연에서 조광조는 왕에 대한 비판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1518년에는 29건의 지진, 1519년에는 28건의 지진, 1520년에는 26건의 지진, 1521년의 20건의 지진이 있었습니다. 중종 시기에 천재지변이 많았던 것인데 이런 재앙을 중종이 부덕한 것으로 보았고 조광조는 이와 관련하여 왕에게 훈계도 했다고 합니다. 
중종은 사림파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맞추려 했습니다. 그런데 중종의 생각과는 다르게 신권이 너무 커져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조광조가 있었습니다. 결국 왕권을 강화해야겠다는 중종의 생각과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결실을 맺기 위해서 왕권보다 신권이 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조광조가 서로 정치적 파트너로 만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이었습니다. 솔직히 이러한 불협화음은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정도전이 희생되었고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면서 사육신을 희생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 대해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성리학자이자 선비로서 그 뜻을 굽히기 싫었던 것일까. 조광조의 거침없는 말은 계속되었고 조광조의 개혁정책에 중종은 피로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를 알아챈 것은 조광조에 대한 반대파였습니다. 이에 심정, 남곤이란 자가 조광조를 모함하기 시작합니다. 조광조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광조는 훈구파를 제어하기 위해 시험으로만 인재를 뽑는 과거제 외에 추천받은 인재를 대상으로 시험을 보게 하는 현량과를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현량과를 통해 들어온 사람의 50% 이상이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라는 한계가 있었고 이는 훈구파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현량과제도가 조광조와 사림파가 힘을 잃어버린 후에 폐지되었다고 하니 아마 훈구파는 현량과를 통해 조광조가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려 한다고 왕에게 간언했을 수도 있습니다. 왕권시대라는 것이 결국 왕에게 접근하는 세력이 누구냐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었는데 훈구파의 세력의 접근은 앞으로의 기묘사화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조광조는 위훈삭제를 요청합니다. 중종반정 때 공신들 가운데 상당수가 연산군 때 아부했던 이들이므로 공훈을 삭제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종반정의 공신 박원종은 큰 연못과 정자가 있는 집에서 많은 기생들을 불러 음주가무를 매일 즐길 정도로 사치스러웠다고 하며 지나치게 공신이 많고 이 중 30여 명은 공신의 자식이거나 친족집단이니 이에 대한 폐단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지만 중종은 자신이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니 조광조의 이러한 요구는 무척 난감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국을 쥐고 있던 조광조 세력에 못이겨 정국공신 76명이 삭제되었습니다. 


이에 훈구파는 참지 못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바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하여 조씨가 왕이 된다는 문구가 새겨진 나뭇잎이 궁궐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이 나뭇잎은 누군가가 꿀을 발라 그 자리를 벌레가 갉아 먹게 한 것인데 진실은 아닐지라도 중종의 심기를 건드리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519년 11월 15일 중종은 자신의 측근 세력을 궁궐로 부릅니다. 왕이 밀지를 내려 신무문을 통해 조광조의 반대세력이던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로 하여금 조광조 체포령을 내립니다. 사실 전날만 하더라도 조광조를 다독인 중종인지라 조광조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광조는 감옥에 갇히면서도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정말 신하로서 도리를 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붕당을 만들어 역모를 꾀했다는 것, 따라서 조광조는 유배를 떠나게 되었고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때의 나이 38세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그는 절명시(絶命時)를 남깁니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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