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생생한 기록 임진왜정도
2022. 12. 31. 08:2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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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전투의 경우는 사진이 발명되지 않았을 만큼 그 모습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으며 유물이나 유적으로 가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생생한 전쟁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물론 임진왜란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있으나 이것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당시의 모습을 찰나에 포착하여 담은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정도」만은 당시 종군화가가 참여하여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따라서 이 「임진왜정도」를 통해 당시의 생생한 전쟁의 모습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임진왜정도」의 배경은 전라남도 순천시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임진왜정도」는 원본을 촬영한 11장의 사진으로 당시 순천을 중심으로 한 임진왜란의 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오래전 콜럼비아 대학의 게리 레드야드(Gari K. Ledyard) 교수가 미국에 사는 중국 출신의 시민으로부터 감정을 의뢰받았던 것에서 시작합니다. 교수는 이 그림을 흑백사진으로 찍었고 그 중 몇 부분은 컬러사진으로 담았습니다. 그림은 중개인을 통해 홍콩에 살고있는 사람에게 팔렸으며 소재는 현재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이 그림이 알려진 것은 1978년 <신동아> 12월호에 게리 교수가 200자 원고자 75매 분량의 <임진정왜도의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기고하면서부터였으며 이 논문에는 노량해전과 왜교성 전투에 관련된 10여 매의 그림·사진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두루마리로 된 그림의 길이는 6.5m로 당시 명나라의 군대를 따라온 사람에 의해 그려진 것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공적을 찬양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이순신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림에서도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주인공으로 그려진 듯하기 때문에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을 진린을 따라온 화공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201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그림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된 병풍을 영국 딜러를 통해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이 병풍에는 순천왜성 전투에 참가한 명의 제독 유정(劉綎) 휘하의 육상군과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 명 수군제독 진린(陳璘) 연합군의 합동작전 등이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림의 배경이 되는 순천시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어떤 유적지가 있을까. 바로 순천왜성입니다. 이곳은 일본에 가지 않더라도 일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육지부를 파서 바닷물이 차도록 섬처럼 만들고 연결다리가 물에 뜨도록 했으며 정유재란(1597년)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선봉장 우끼다히데이와 도오다카도라가 호남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으려고 3개월간 쌓은 토석성입니다. 이 성의 면적은 18만8,000 여 m²(6만여 평), 성곽 외성 길이는 2,502에 달하는 성으로 당시에 지어졌던 남해안 26개 왜성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입니다. 이 곳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이자 최후방어기지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으며 침략 최정예 부대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 4000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 수륙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최후·최대의 격전을 벌인 곳입니다. 『난중잡록』에서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선조 31년 9월에 쌓기 시작하여 12월에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성을 쌓은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일본군이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에 대패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왜군은 해상권을 쥐고 수륙병진작전을 펴고자 했는데 이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고 전라도 지역의 육군에게는 이것이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으로 내려와 약 11개월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순천의 왜성을 포함한 남해안에 쌓은 28개에 달하는 왜성은 치밀한 계획 하에 세워진 것입니다. 당시 왜군은 왜성을 본거지로 삼았으며 이곳으로 수많은 조선인을 잡아왔습니다.
‘신분증을 나눠주고 사람들을 모아 마을을 만들어 각 사람에게 쌀 서말씩을 납부케 해 군량미를 비축했다.’ 「난중잡록」
그리고 이곳은 왜군들의 근거지이자 조선인들의 포로수용소역할도 했습니다. 왜성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은 무려 15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왜성은 단순한 군사기지가 아닌 조선인납치와 조선문화 약탈의 중간지역할을 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은 글로써 남겨진 것은 많지만 당시 그림으로는 「임진왜정도」가 유일합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약 4400여명, 왜군이 약 2070명, 이 중 884명은 시체이거나 물에 빠진 사람이고 2330명의 조명연합군도 그려졌습니다. 그림에는 205척의 배를 확인할 수 있으며 136척은 조명연합군의 것이고 99척은 왜의 선박입니다. 왜의 선박 가운데 53척은 바다에 떠 있고 46척은 불길에 휩싸이거나 침몰당하고 있습니다. 당시 침몰당하거나 불에 타고 있는 연합군측의 선박은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기록화로서보다는 명나라의 활약상을 알 수 있는 그림으로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 수군의 배로 추정되는 배가 그려진 그림에서 기대했던 거북선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나 대신 태극 문양을 인용한 깃발이 달린 것입니다. 기존에 알고 있는 것으로는 1882년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고안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로 가면서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기 300여 년전에 태극기를 조선의 수군이 사용한 것입니다. 아마 적어도 조선 전기에도 태극이라는 무늬를 새긴 깃발을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의 수군은 천병(千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달고 참전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깃발이 전쟁 중에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조선군과 명나라군을 구분하기 위한 그림에서의 설정은 알 수 없으나 「임진왜정도」의 한 모습에서 태극기의 기원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조명연합군 지휘관의 선상회의 장면과 명나라 제독 유정이 소서행장과 협상하기 위해 성밖으로 유인해 나오는 장면, 그리고 이를 왜군이 눈치를 채고 황급히 성안으로 달아나는 장면, 1598년 11월 19일에 벌어진 노량해전의 모습 등을 담았으며 순천왜성 안에 천수각도 표현하였는데 이 시설은 일본군 수장이 머무는 곳이라고 합니다.
1598년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연합군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육지 쪽에는 권율(權慄) 도원수와 유정(劉綎) 제독의 조명연합군이 버티고 있었고 바다에는 이순신(李舜臣) 삼도수군통제사와 진린(陳璘) 도독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조명연합군은 4로병진작전을 계획합니다. 사로병진책은 명과 조선, 두 나라의 연합군을 네 갈래로 나눠 왜군을 공격한다는 것,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납니다. 「임진왜정도」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탈출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본래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유인해 생포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획의 실패 이유는 왜성이 견고하고 저항도 셌지만 기마병 위주의 명군은 공성전에 적합하지 않았고 명군 내에서 내분이 있었습니다. 진린의 수군은 절강성 출신이고 유정의 육군은 사천성 출신인데 두 지역간이 감정이 안좋았고 이러한 것은 연합작전을 어렵게 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전투를 하려고 하는 않는 유정의 태도였으며 조명수군이 바다에서 공격할 때도 제대로 된 전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수군 또한 대패했는데 진린은 바다의 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뻘에 갇혀 왜군에 당한 것입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겠다기보다는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후 이순신과 진린은 왜군이 순천왜성 앞바다로 진격해 온다는 첩보를 접하고 47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향합니다. 전투는 연합군에게 승기가 기울어졌고 일본수군 전선 200척이 침몰하였습니다. 하지만 왜장들은 가까스로 본국으로 도망갔으며 그 중에는 고니시 유키나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전에서 조선은 최고의 명장 이순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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