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척의 배를 이끌고 승리, 명량대첩
2022. 12. 29. 08:1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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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쟁 역사상 가장 빛나는 전투 중 하나가 바로 명량해전입니다. 13척의 배만으로 133척의 왜선을 무찌른 기적같은 승리, 전투를 이끈 이순신조차도 천행(天幸)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천행(天幸)에만 맡겨질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조선군이 이길만한 요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벌어진 임진왜란, 여기서 일본의 예상치 못한 조선 수군의 해안권 장악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렸습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을 배제한 채 명나라와 협상을 벌였으나 곧 결렬되고 이는 재침으로 이어지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조선조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균으로 하여금 일본의 수군을 격파하라고 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를 당하며 150여 척의 배가 가라앉았고 여기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도망쳤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한 왜군에게는 보급로를 확보한 의미있는 승리였습니다. 그럼 이 때 이순신은 어디 있던 것일까.
당시 이순신은 일본의 요시라(要時羅)가 모함하는 바람에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에 임금 선조는 이순신을 문초하게 되고 전라 병사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습니다. 당시 요시라는 일본은 위해 거짓으로 조선조정을 속였고 백성들은 이순신의 파면 소식에 크게 낙담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권율 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원균은 일본군을 맞아 쫓아가다가 깊숙이 들어갔고 이게 잘못되었음을 안 원균을 다시 회군을 명령했지만 조선의 기세가 꺾인 것으로 생각하고 추격한 일본군에게 대패를 당한 것입니다. 당시 원균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죽었으나 당시 배설은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을 낼 때 내야 한다며 원균의 죽기 살기로 일본군과 싸울 때 12척의 배를 이끌고 도망칩니다. 어쩌면 비겁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이 배들이 나중에 ‘이순신이 말하는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말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 패배로 조선은 재해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지난날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주기 바란다.’
선조가 내린 교서는 사과의 뜻이 담긴 명령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선조가 돌연 입장을 바꾸어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순신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직 12척이 있다는 말과 함께 신(臣)이 있다면 적군도 두려워할 것이라며 선조의 마음을 바꾸게 하였고 이로써 조선의 수군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2척의 배와 함께 남은 것은 군사들의 떨어진 사기 그리고 정말 몇 안되는 무기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휘하의 부하장수들을 모아놓고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고, 또한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足懼千夫)’는 병법의 말을 인용, 전투에서 승리를 다짐하고 명령을 어길 시에는 군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엄한 말도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1597년 음력 9월 16일 조선의 수군 13척은 왜선 133척과 맞붙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적선 사이에 들어간 것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상선(上船) 하나였습니다. 다른 배들은 이 광경을 멀찍이 보고 있었고 이순신은 ‘적선이 비록 1천 척일지라도 감히 우리 배로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온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순신은 군법에 따라 뒤에 있는 아군 배의 지휘관을 처단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뱃머리를 돌리면 아군의 배들이 뒤로 물러설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깃발로 아군들을 부르며 전투를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원균 사후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 공은 단기(單騎)로 군졸들을 불러모아서 명량(鳴梁)으로 나가 진을 쳤다. 갑자기 밤중의 습격을 받아서 소수의 군졸로 필사전을 벌인 결과, 새로 모은 13척의 전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수많은 적을 상대하여 30척의 적선을 파패시키고 용맹을 다하여 전진하니, 적들이 마침내 퇴각하여 도망쳤다.” 『백사집』
당시 이 전투 이전에 적병이 기습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동요하지 말라고 소리쳤고 적은 철군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순신은 백성들의 피난선을 물가에 배열하여 진을 치게 하였는데 이는 전선으로 오인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소극적인 조선 수군의 모양세에 왜선들은 이를 격파하려고 근접했으므로 이는 이순신의 작전이었습니다. 작전에 말려든 왜선은 명량바다로 뛰어들었고 조선장수 안위의 배가 조수의 흐름을 이용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왜선이 3척이 달려들어 백병전을 펼쳤으며 그리고 이후 이루어진 전투에서 조선의 수군은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였고 이순신은 왜장 구루지마 마치후사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았습니다.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결국 이 싸움에서 왜선 10여 척만이 탈출하니 우리나라 해전 역사상 빛나는 명량대첩이 완성된 것입니다. 당시 이 광경을 백성들이 통곡하면서 비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 즈음 적병들이 모조리 섬멸되었고 아군의 배가 멀쩡함을 확인한 백성들은 감탄했습니다.
명량해전은 우리나라 전쟁뿐 아니라 세계 해전에서 기억되고 있는 대승이었습니다.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당시 일본의 배는 안택선이라는 배로 갑판 위에 가옥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불렀습니다. 이러한 안택선에 대항한 조선 수군의 배는 판옥선으로 겉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안택선은 쇠못을 이용하는데 판옥선은 나무못을 이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안택선의 쇠못은 충격에 빠져버릴 염려가 있고 쇠가 부식될 염려가 있어 이는 주위의 나무까지 함께 썩게 하기도 하는데 이에 반해 판옥선은 나무못은 물과 함께 같이 불기 때문에 못박은 구멍으로 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판옥선은 밑이 평평하여 빠른 회전이 가능하지만 안택선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뾰족하여 회전에 어려움을 가졌습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수군의 배가 당시 일본의 배보다 우수했기 때문에 더 나은 전투력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화포를 사용했고 왜군은 조총을 사용했습니다. 조총은 활과 칼로 맞선 조선의 육군에게는 큰 위력을 발휘했으나 해전에서는 달랐습니다. 배에다 포를 장착하고 다녔는데 이것이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대포제작기술이 전무했고 서양에서 들여올 수 있어서도 일본의 배는 이러한 대포를 장착할만 것이 못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방에 많은 포를 장착한 조선의 배들에게 일본은 수군은 심각한 전력 차를 실감해야 했습니다.
위에 열거한 요인들은 이순신이 참전한 어느 해전에서나 해당되는 것들이라면 이순신은 울돌목이라는 지형지세를 적절히 사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인 명량해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섬나라이고 고려말 때부터 왜구가 기승을 부려 괴롭혀왔으므로 울돌목의 센 물살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지형적 조건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작전을 짜고 빠른 물살을 건널 줄 알았던 왜군은 이것을 활용한 이순신의 지략에 대패를 당한 것입니다.
다망 명량해전에서 ‘철쇄, 즉 쇠사슬과 철구로 적선을 깨뜨렸다.’라는 내용이 당시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밀물을 타고 울돌목에 들어선 왜선들이 미리 쳐놓은 철쇄에 걸렸고 이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형세에 있다가 조선의 공격에 꼼짝없이 당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전쟁 당시 기록에 철쇄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없다는 점과 명량해협이 가장 좁은 곳이 295m이며 전란 중에 설치했다는데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 등이 철쇄를 사용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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