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조선화약무기 총통

2022. 12. 27. 08:1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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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화약을 실어 사용한 무기를 총통이라 했는데 그러니까 일본군이 조총을 사용했을 때 우리는 총통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총통은 어떤 무기였을까. 그리고 일본의 조총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총통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총통을 만들었을 때에는 활을 보조하는 무기였습니다. 처음 대나무 마디처럼 일정한 분사형의 총통을 만들어 그 속에 화약을 집어넣고 화약이 약실에서 폭발하는 힘으로 앞으로 투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이나 고려의 주 무기가 편전인데 이것을 총통 안에 넣어서 화약의 분출물에 의해서 투사를 시키는 것이 총통의 처음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검이나 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으므로 조선의 세종은 이 무기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세종은 한글을 직접 창제하고 조선 과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군주로서 면모를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세종의 치세에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국방력이 뒷받침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위로는 여진과 남으로는 왜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화약무기 개발을 병행되어야 했습니다. 특히 세종은 이를 직접 감독할 만큼 무기개발에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총통무기개발에도 열을 올렸는데 이전까지의 총통은 장전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그 해결책을 찾는데 노력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사전총통과 시제총통이라고 합니다. 이전까지 중국의 총통을 모방한 것에 벗어나 독자적인 기술로 조선 총통이 완성된 것입니다. 사전총통은 4발에서 6발 혹은 8발의 화살을 넣어서 사용하는 다연발화기였고 신제총통은 이보다 작고 휴대가 편하게 만든 총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의 총통으로 천자문에서 그 음을 빌려와 천자화통(장군화통), 지자화포(일총통), 현자화포(이총통), 황자화포(삼총통)로 분류하였고 조선중기에는 이 외에도 우자총통과 주자총통이 추가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조선군은 패배를 당하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해전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조선은 선진적인 항해술과 전투능력이 가능한 판옥선과 조류와 지세를 이용한 이순신의 전술이 있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총통이었습니다. 당시 판옥선에는 대형화포가 장착되었으니 천자총통은 사정거리가 900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총이 도입되면서 소형총통이 개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총통은 나무를 끼우는 자루구멍인 모병부와 불붙은 심지가 타들어가 화약이 폭발하는 약통(약실), 화약이 나가는 부리(취)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총통의 특징으로 죽절이 있었는데 총신이 파열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고 이는 화약을 넣어서 쏠 때 열이 많이 발생하는데 포신이 달아올랐을 때 그 열을 식혀주는 냉각기의 기능을 한 것입니다. 
승자총통은 선조 16년 전라도와 경상도 감사를 지낸 김지가 만든 총통으로 이전의 총통들이 천자문 앞글자에서 딴 것과 달리 이 총통은 이길 승(勝)을 붙여 승자총통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여진족을 상대하면서 그 효과를 입증하였습니다. 승자총통은 일종의 개인화기로서 이전의 총통보다 총구의 길이가 길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전의 무기보다 명중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총통을 장전할 때에는 화약과 격목 그리고 화살 순으로 넣었습니다. 격목은 화약과 화살 사이에 폭발압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초창기 이 격목이 나무였습니다. 하지만 전시상황에서 이 격목을 찾고 다닌다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승자총통부터는 진흙을 넣어 발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화살을 넣어 사용한 총통이었으나 나중에는 탄환을 사용하였고 승자총통은 화살에서 탄환으로 바뀐 처음이자 마지막 총통이었습니다. 이 승자총통은 기존의 총통보다 사거리도 더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1588년(선조 21)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였던 이일(李鎰)이 여진족의 시전 부락을 소탕하는 작전에서도 승자총통이 크게 활약하였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초기에는 이 승자총통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조총은 빠른 발사가 가능했지만 혈선이 타들어가 발사하는 총통은 움직이는 물체를 향하여 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망암화차

하지만 조선에서는 화차라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화차는 수레에 여러 개의 총통을 탑재한 다연발 로켓포로 이러한 화차는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만든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신기전 안에 총통이 50개가 들어가고 이 총통 안에 4개의 화살이 들어가니 한 번 발사하면 200발이 발사되는 것이 총통신기전으로 이 무기가 행주산성에서 활용되었습니다. 화차는 이전 시기인 문종 대에도 만들어졌으나 당시는 무기를 활용하는 정도였다면 행주산성에서 활용된 망암화차는  승자총통 40문을 수레위에 설치하고, 발사체는 철환으로 하여 철환(쇠구슬)은 1개의 승자총통에서 약 3-15발 쏠 수 있으므로 화차 1량 당 최대 600발의 철환을 동시에 발사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이 무기는 아군이 장갑차처럼 안에 탑승하여 몸을 보호할 수 있었고 이전 화차과는 달리 1면이 아닌 3면에서 발사가 가능한 무기였습니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사람을 확인할 수 없는 무기였으니 적군 입장에서는 이것이 어떤 무기였는지 가늠할 수 없었으므로 망암화차가 가지는 능력은 이전 화차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행주산성에서는 망암화차가 총 40대가 동원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산개전투가 아닌 집단전투적인 모습이 강했기 때문에 현대의 기관총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화약무기를 경험했음에도 망암화차가 활용되었던 적은 없었던 탓일까. 조총의 위력을 믿고 올라온 일본은 이 망암화차의 위력 앞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시민이 정예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군의 서쪽에 진을 치고 일시에 돌입해 비가 퍼붓듯 호라을 쏘고 총을 발사하니, 적들이 완전히 궤멸되어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잇닿았다.’ 『고대일록』
우리는 당시 총통의 조총보다 떨어진 무기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만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조총의 사거리는 11.25g의 탄환을 사용하면 300~400m, 15g정도의 탄환을 사용하면 600m정도의 사거리를 가졌습니다. 이에 비해 승자총통은 약 700m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승자총통에 사용된 철환의 무게는 22g으로 화력도 더 강했습니다. 그리고 유효사거리는 조총은 100m~120m, 승자통은 100m~ 160m였습니다. 게다가 승자총통은 장전속도에 있어서 조총에 더 우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총통은 조총에 명중률이 뒤처졌습니다. 조총은 탄환이 총열에 꽉 물려 발사되어 승자총통보다 탄도안정성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총에는 가늠자와 가늠쇠로 총열을 정렬하여 조준사격이 가능했고 몸에 밀착한 안정사격자세가 유지되었습니다. 게다가 방아쇠가 있어 원하는 타이밍에 사격이 가능한 것이 바로 조총이었습니다. 반면 조선의 총통은 옆구리에 대고 발사했고 심지가 다 타들어가는 동안 발사대기시간이 있으므로 명중률이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낮은 명중률을 극복하기 위해 일발다전법으로 극복하려 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적군이 뭉쳐서 달려들면 강한 위력과 긴 사거리 그리고 넓은 살상범위를 가진 승자총통이 더 유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승자총통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자총통의 주재료는 구리였는데 당시 조선은 총통을 대량 생산할만큼 구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절의 종을 녹여 총통을 제작해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 철로 만든 조총은 재료수급에 있어서 훨씬 용이했고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조총은 누구나 가진 무기였으나 조선의 총통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또한 승자총통의 위력에 비해 화약도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그에 비해 조총은 3분의 1수준의 화약만으로 운용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총통은 조선 군대 누구나 소지할 수 없었던 무기였고 그에 비해 많은 일본군은 조총을 사용했습니다. 승자총통은 사거리와 화력, 발사속도에서 우위를 가졌으나 명중률과 발사타이밍에서 조총이 더 우위에 있었고 기본적으로 보급에 있어서 승자총통은 조총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후 승자총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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