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궁녀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2022. 12. 25. 08:1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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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인 세종 2년 1월 9일에 왕은 인덕궁에 있는 여인들의 생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하고 대신들에게 물으니 한 대신이 월급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고 이에 왕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식사와 함께 개인 몸종인 방자와 밥해주는 취반인, 물긷는 사람인 무수리를 붙여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왕이 편의를 봐준 이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궁궐의 모든 살림을 담당했던 정 5품의 상궁과 상궁 하위직급 시녀를 포함한 그들, 바로 궁녀였습니다.
궁녀는 내명부 품계를 받은 조선 유일의 여성공무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왕족을 보필해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선발기준이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속대전』 형전 공천조에서는 ‘궁녀는 직 여러 관서에 소속된 관노비로 뽑아 들인다. 양인 여성을 일절 논하지 않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은 조선 초기 궁녀 선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효종 4년인 1653년부터는 양가의 딸을 뽑아 궁녀로 삼았으니 민간에서는 궁녀로 뽑히기 꺼려하여 조혼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왕조에서는 이러한 궁녀선발의 폐단을 알고 양가의 딸을 뽑지 않고 관청의 노비를 궁녀를 택하는 것을 명문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의 상공계층 출신의 궁녀가 많았으며 침방 궁녀까지는 중인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하나 아마 에외적이고 불법저인 일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기록에서는 관노비 가운데 조상·친인척 중 죄인과 병력 없는 집안의 아이를 선발하였으며 첫 번째 아이의 딸이어야 할 것, 근친 중에 결혼을 두 번한 사람이 없어야 할 것 등의 선발기준이 있었는데 궁녀가 결국 왕가의 사람들을 보셔야 하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엄격한 기준을 두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궁녀가 처음 궁에 들어오게 되는 나이는 대개 어린 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밀은 4~5세, 침방과 수방은 7~8세, 그 외 부서도 13세의 어린 소녀들로 선발하였는데 이 때 지밀궁녀는 왕의 침실을 돌보는 일을 맡은 궁녀였습니다. 이렇게 궁궐에 들어온 궁녀들은 혹독한 교육을 받았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어느 정도 궁녀 행세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궁녀도 경력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있었을까. 잇단 갓 궁궐에 들어온 어린 견습나인을 생각시라 불렀습니다. 견습나인을 뽑기 위해서는 앵무새의 피를 이용하여 처녀성을 확인하는 선별하는 작업이 있었는데 피를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고 탈락시켰습니다. 이러한 비과학적인 방법이 당시에도 먹혔을지 의문스럽지만 이렇게 뽑인 생각시들은 머리를 곱게 빗어 뒤에서 두 가닥으로 땋아 말아 올려 뒷머리 밑에 나란히 붙여 머리를 묶었으며 댕기를 늘이고 노랑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조용히 말하고 본 것을 본 곳에 두고 들은 것을 들은 곳에 두라는 충고를 하였다고 하니 이들은 평상시에도 조용조용히 말하고 둘이서 한 방을 쓰더라도 바깥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사용하는 궁체는 조선 중기 궁녀들의 글씨체를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엄격하고 통제된 생활상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로서 바꾸어 이야기하면 각각의 개성이 배제된 글씨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입궐하면 각자 부서에 배치 받았는데 지밀·침방·수방·세수간·생과방·소주방·세답방의 부서가 있었습니다. 지밀은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의 일거수일투족을 거드는 요직으로, 의식주는 물론 성생활과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도 담당하였고 그 때문에 이 일을 하다가 왕의 눈에 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장희빈도 숙종의 할머니 장렬왕후를 보필하는 지밀궁녀였다고 하며 숙종이 장렬왕후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들렀다가 장희빈을 보고 반해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침방은 궁궐에 사용되는 의상과 소품을 만들었고 수방은 옷에 수를 놓거나 장식품을 달았습니다. 세수간은 세숫물이나 목욕물을 받는 곳이었고 청소와 병기 세척을 도맡았습니다. 소주방은 수라간이라고 불리는 부서로 밥과 반찬, 제사음식과 잔칫상 음식을 만들었으며 생과방은 식혜, 떡, 과일, 죽 등의 음료와 다과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세탁과 관련된 일은 세답방에서 하였으며 이 부서에서는 빨래와 다듬이질, 그리고 염색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들을 도와주는 비자, 방자, 무수리 중 일부는 위에서 열거된 7가지 업무를 돕기도 하고 관비 중에서 차출된 비자는 궁녀들 사이에 잔심부름 역할을 하며 그들 사이의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상궁들의 살림을 담당하는 가정부로 궁녀들의 추천으로 일을 하게 된 방자는 상궁의 집에 기거하며 일하거나 시간제로 나와 일하는데 이들도 월급을 받았으니 공무원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수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물을 떠 나르거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등 잡다한 일을 하는 최하층의 사람들로 출퇴근이 가능하고 여타 궁녀들과는 달리 결혼도 가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궁녀로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입궐한지 15년 정도 되면 나인이 되고 남색 치마에 옥색저고리를 입는 복장으로 변화되었는데 이 때 관례를 치르고 본격적인 궁녀로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치루어지는 관례를 혼례의 성격도 띠고 있는데 평생 왕을 위해 살아야 하는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스승상궁으로부터 2명씩 짝을 이루어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내명부에 기록되어 하급품계도 받았으며 월급도 밭았습니다. 하지만 평생 결혼도 못하고 인생의 대부분을 궁에서 갇혀 살아야 되는 운명을 직감했는지 동성애가 빈번했으며 기록에서는 ‘예로부터’라는 표현을 썼으니 궁녀들 간의 동성애가 조선시대에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15년이 지나 상궁이 되면 옥색저고리에 남색치마에 당의를 입고 머리장식으로 개구리 모양의 첩지를 머리에 달았습니다. 직급이 있는 궁녀들을 여관이라 하였는데 상궁은 이들 중에서 리더였습니다. 그리고 개인 집을 가지고 있었고 하녀도 있었습니다. 상궁은 정5품의 직책을 받을 수 있었으며 700여 명에 달하는 궁녀들의 촉 책임자는 제조상궁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부제조상궁이 있었으며 서열3위에는 지밀상궁이 자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서열에는 감찰 상궁이 있었는데 감찰상궁은 궁녀들의 불법을 감시하고 체벌이나 유배의 형벌도 내렸으니 궁녀들 사이에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자들의 보모역할을 하는 보모상궁과 문서관련업무와 종실과 외척의 뒷일을 담당하는 시녀상궁이 있었습니다. 궁궐에 4~5세 전후에 들어온다고 한다면 30년이 지나 40살 전후한 나이에 최고의 상궁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상궁이라 함은 여관들의 대표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왕의 측근에 있으면서 중요정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들도 왕실에서 일하는 공무원인 만큼 월급을 받았는데 이들에게는 옷값으로 의전이 1년에 두 차례 지급되었고 선반이라 하여 식사가 제공되었으며 삭료봉급도 주었는데 이것은 쌀이나 콩을 말하는 것으로 나인(정7품 이하)은 쌀 7.5말, 콩은 6되를 받았고, 상궁(정5품 이하)은 쌀 16.5말, 콩 5되, 제조상궁(1명)은 쌀 25.5말, 콩 5되가 지급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봉급을 오늘날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직급에 따라 250만 원 수준에서 1000만 원에 가까운 금액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궁녀란 직책이 선망이 되었을 수도 있고 평생 왕실을 일을 하며 궁안에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기피직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승은을 입으면 왕과의 공적인 관계에서 사적인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급격한 출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장희빈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생 궁궐안에서 갇혀 살아야 했을까요. 이들은 상전과 같은 운명공동체라 생각하여 왕이 죽으면 출궁했으며 중병에 걸리거나 나라에 가뭄이 들었을 때는 음양의 도가 일그러져 자연재해가 들었다고 생각하여 궁녀들을 내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출궁한 궁녀들은 결혼할 수 없었다고 하니 궁녀란 직업이 과연 선망이 직업이었는지 기피직종이었는지 아마 사람에 따라 달랐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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