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저팬타운 삼포

2022. 12. 23. 08:1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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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에 수록된 ‘동래부산포지도’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일본인이나 일본계 사람들이 밀집하여 사는 지구를 저팬타운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그러한 저팬타운이 있었으니 그 곳은 바로 조선 속의 왜인촌이라 불리던 삼포라는 곳으로 삼포는 제포와 염포, 부산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삼포에 정착하여 사는 왜인들을 항거왜인이라 불렀습니다. 특히 이러한 조선의 삼포와 연관이 많은 곳은 바로 대마도였습니다. 이곳은 산지가 97%인 곳으로 경지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육지와 교역을 해서 물자를 충당해야 했는데 일본보다도 부산이 더 가까웠던 섬입니다. 그래서 대마도에 살던 사람들 중 조선의 물자를 약탈하러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왜구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왜구들은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 해안까지 출몰하였고 조선과 명나라는 일본 막부에 이를 통제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일본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외곽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조선과 명나라 입장에서는 각자 대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썼고 조선도 역시 골치덩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 원년인 1419년에 했던 것이 바로 대마도 정벌이었습니다. 이종무의 지휘로 이루어진 이 정벌로 대마도는 저항을 포기했고 조선은 대마도가 조선의 땅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 제작된 조선의 고지도에서는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토로 표기되었고 왜구문제도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마도 정벌이 강경적인 대응책이었다면 조선은 이들에게 무역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포이며 왜구는 이 때부터 상인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선정부는 투항한 왜구들에게 토지와 집을 주고 살게 하였으니 이를 향화왜인, 일정한 곳에 와서 상업하는 곳을 허락했으니 이러한 무리를 흥리왜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점차 이들이 수는 증가했는데 규제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는데 조선인의 집에 가서 거래를 하거나 경상도 각 포구에 정박해 군사기밀을 엿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경상도병마절제사 강사덕은 흥리왜선이 도만호가 있는 곳에 와서 정박하도록 결정해 달라고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포와 부산포 2곳의 포구가 지정되었으니 그 때가 바로 1407년입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한 개항이 강제 개항이었다면 1407년의 개항은 일종의 자주 개항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왜관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기는 하나 왜관이 설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여기서 왜관은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조선에서 통상을 하던 무역처를 말합니다. 그런데 제포와 부산포에 흥리왜인이 늘어나고 왜관에 살기 위해 오는 항거왜인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관의 부지가 좁아진 것입니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1418년 3월에 울산 염포와 고성 가배량에 왜관을 설치하니 본격적인 삼포 개항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건너와 이곳에 살게 되었는데 그 숫자가 1466년 1650명에서 1494년 3105명으로 두 배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건너온 이들 중 대부분은 제포에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삼포왜란

이들 삼포에 사는 일본인들 간에도 격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포의 일본인들이 가장 많기도 했지만 옷 입는 모양새가 가장 나았습니다. 반면에 부산포와 염포에 살던 일본인은 가난했습니다. 따라서 대마도의 일본인은 제포를 낙토(樂土)라고 여겼습니다. 제포에 살면서 부를 축적한 일본인은 조선인을 상대로 고리대를 하였으며 이들에게 빚을 받아내기 위해 제 집 드나들 듯이 하였습니다. 이곳에 사는 왜인들은 조선의 사정에 대해 이해도가 높았으며 조선인과 결혼하거나 혹은 양자를 들이거나 의형제를 맺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서울의 부자나 상인들이 모여들어 장기간 머물며 장사를 하니 밀거래가 성행하여 조선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팠습니다. 겉으로는 활기찬 국제무역도시였는지 몰라도 다른 나라의 상인이 들어와 산다는 것은 조선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보면 이러한 일본인들의 상행위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이러한 상업 활동으로 왜구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었고 그에 따른 국방비 절감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조선입장에서는 얻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조선 입방에서는 국방문제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화약무기 개발에 힘을 썼고 그에 따라 많은 동철이 필요했는데 필요한 동철을 대왜무역을 통해 얻었고 그 무역창구가 바로 삼포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역경로를 통해 조선은 일본에 면화를 수출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명주, 삼베, 모시가 주요 수출품이었고 15세기 후반 일본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때에는 일본에서 목면이 군수품으로 사용되면서 수출이 증가되었고 유구국의 물소뿔이 무역품목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수우각이라 불리던 물소뿔은 양반들의 관복에 차던 관대나 활의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상인들은 중국산 비단이나 비단의 원료인 백사를 들여와 3포의 왜인들에게 팔아 이익을 남겼으며 조선에 비해 불교문화가 뒤쳐져 있던 일본이나 유구국은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니 그 횟수가 80여 차례에 달했습니다. 당시 삼포는 중국과 유구의 물건도 오가는 중개 무역지로서 역할과 동시에 문화, 사상의 교류장소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일본 류코쿠대학 도서관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내이포, 부산포, 염포’가 표기돼 있다.

삼포에서 활동하는 왜인들이 많아지자 조선은 1443년에 계해약조를 통해 이를 정리했습니다. 계해약조는 일종의 교린정책의 일환으로 전행되었으며 세견선은 50척으로 한정, 삼포에 머무르는 자의 체류기간은 20일로 하며, 상경한 자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看守人)은 50일로 하며, 이들에게 식량도 배급할 것, 그리고 대마도주에게 매년 쌀 200석을 하사한다는 내용 등입니다. 
  삼포를 통해서 중요한 국가산업기밀도 유출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연은분리술이라는 당시로서는 최신기술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것입니다. 1503년 양인 김감불과 장예원 노비 김검동이 연광석에서 은을 분리·재련하는 새 기술을 개발했는데 이를 회취법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기법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1539년 8월 “유서종이 왜노와 은밀히 통해서, 연철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하였다”고 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유서종은 사형은 면했고 일본으로 전해진 회취법은 이와미 은광에서 활용되어 은광개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렇게 유출된 조선의 기술로 채광된 일본의 은은 다시 조선으로 수출되어 서울 시전을 가득 메웠고 그 양이 많아 천한 물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왜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3포의 왜인들에게 명목상이긴 하지만 벼슬도 내려주기도 했으며 벼슬을 받은 왜인을 수직왜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삼포에 들어온 왜인들은 한양으로 가 왕께 인사를 드리도록 했는데 이를 통해 조공외교를 했고 조선은 일본이나 유구보다 상국이라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조공에 대한 답례품으로 지급되는 면포의 부담이 많아지고 왜인들의 고리대로 인해 조선인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가 한편 왜인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살인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던 1505년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잡음이 많았던 삼포에 대한 제약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510년 일본인들은 약 4,000명 ~ 5,000명 정도의 사람들을 모아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각지에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부산포, 제포 등이 함락당하였고, 부산포 첨사 이우증 등이 살해당하였으니 이른바 삼포왜란이었습니다. 삼포왜란은 보름 만에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로 삼포는 폐쇄되었고 조선은 대마도와 단교를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삼포의 폐쇄의 여파는 실로 컸습니다. 일본은 동남아로 눈을 돌려 화승총을 받아들여 막강한 군사력을 키웠고 조선은 이국의 문물을 만날 수 있는 창구를 스스로 닫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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