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역관이 되려면
2022. 12. 24. 08:1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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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2년인 1393년 9월 19일 조선은 사역원을 설치하고 중국말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은 건국하면서 외교정책으로 사대교린정책을 썼기 때문인데 이 정책은 중국을 사대하고 그 주변의 이웃나라하고는 사귄다는 내용으로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할 사람, 즉 역관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이전 고려시대에는 외교는 중요했고 따라서 역관을 양성하는 학교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록이 충분하지는 않으며 고려 충렬왕 때에 통문관이라는 기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 기관이 태조 2년에 사역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갑오경장(1894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역원은 역관을 양성하는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으로 외교를 위해서는 역관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선은 국가차원에서 인재를 육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관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역원에서 주변국들의 외국어를 가르치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주변국의 언어를 모두 가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건국초기에는 중국어와 몽고어를 교육했는데 아마 당시 대륙의 주인이 몽골이었고 이후 명나라가 들어섰으니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왕조들은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도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일본어와 여진어가 추가되었습니다. 여진어는 여진학으로 불렸는데 이후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청학으로 바뀌었습니다.
한편 세종 24년인 1442년 2월 14일 사역원 도제조 신개(申槪) 등이 아뢰니 중국말을 능히 통하는 자가 드물고 적어 중국 사신이 올 때 어전에서 말을 전할 적당한 사람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세종대왕은 처방을 내리니 뛰어난 역관 양성을 위해 사역원의 한학생(漢學生)은 반드시 중국어 만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어긴 생도들에게는 횟수에 따라 매질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숙종 대에는 사역원 내에 우어청을 설치하여 선생과 학생 간에 모든 대화를 외국어로 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역원 생도의 평균 연령은 10대가 60.2%, 9세 이하가 28.4%였습니다. 어린 학생들로 구성한 이유는 이러한 어린 자제들이 언어습득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심사하는 것은 현직 역관은 15명이었으며 그들은 지원자의 능력과 가문까지 심사하였고 15명 중 13명의 심사위원이 찬성해야 사역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역원에 입학하면 외국 출신으로 조선으로 귀화한 선생님 밑에서 최소 3년 이상 외국어를 공부했으며 이들이 공부하는 외국어는 주변국의 언어에 따라 중국어를 교육하는 한학청에서 35명, 일본어를 교육하는 왜학청에서는 15명, 여진어를 교육하는 여진학청은 20명, 몽고어를 교육하는 몽학청은 10명의 학생들이 교육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중국어 회화책 『노걸대』와 『박통사』, 일본어 교재로 『첩해신어』를 공부했습니다. 『노걸대』라는 책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중국어 학습서로 총 48장 106절로 이루어진 서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조선의 상인이 중국으로 가서 물건을 팔고 그 곳의 특산물을 사와 다시 귀국하는 과정을 회화형식으로 적어놓은 책으로 중국어 회화교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당시 살아있는 중국어를 보여주는 교재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중국 여관에서 숙박비를 에누리하면서, 못하겠다 옥신각신하기도 하고, 중국에서 싼 값에 구입한 물품을 고려로 가져가 폭리를 취하려는 모습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보초’라는 원나라 지폐의 사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니 훌륭한 회화책이자 여행안내서의 역할을 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용 회화책 『노걸대』를 포함하여 사역원에서 교육한 외국어 교육책은 무려 80여 종에 이르렀습니다.
사역원의 학생들에 대해서는 외국어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에서는 의복과 식사를 제공하였고 그에 따라 학생들은 암기와 번역, 작문을 공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억양과 미세한 표현 그리고 발음까지 교정 받는 등 혹독한 교육을 받았고 이에 더하여 『논어』와 『맹자』등의 사서삼경 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풍습과 문화를 익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문적인 통역관으로서 확인받기 위해 세 달에 한 번씩 평가시험을 치루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학교든지 부진한 학생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역원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3년 동안 공부하여도 한어나 몽고어에 통달하지 못한 자는 퇴학시켜서 군역을 충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잘하는 생도에게는 그에 상응한 것을 베풀기도 하였으니 5차례 연속 시험에 통과할 경우에는 상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사역원에 입학한 것이 역관으로서의 진로를 확정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사역원의 모든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에는 역과시험을 치르기 전에 보는 예비시험 격인 원시를 보았으며 봄과 가을 두 차례 시험을 치르는 원시에서 1푼 반 이상의 점수를 얻은 자에게는 역과 시험에 응할 자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시험을 보아야 하는 역과는 통역관을 선발하는 잡과시험으로 과거시험 중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시험에 합격한 자는 합격자 명부인 방목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현전 방목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연산군 4년인 1498년이었고 갑오경장 때 폐지되기 전까지 총 177회의 역과시험을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총 합격자는 2976명이었고 한학 1863명, 일본어 342명, 여진어 317명, 몽골어 278명이었습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10대 후반에서 20대였으며 합격자 평균연령은 23.7세, 그리고 후대로 갈수록 점점 그 연령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역관이 되면 사대부들의 입과 귀가 되어 다른 나라 사신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므로 나라에 공헌하는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관이 되는 것은 나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집안에서는 가정교사를 모셔두고 교육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지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역관인 변승업의 경우 9남 1녀의 형제 중 6명이 역관이었고 그의 아들과 손자도 역관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우봉 김씨 가문에서는 17세기 이후에 250여 년간 무려 93명이 역과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유명한 왜역관 집안인 천령 현씨 집안에서는 99명의 역관을 배출했는데 그것은 단지 가업을 잇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중국으로 사신일행을 보내는 데 이 일행에 역관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들 일행은 200~300명에 달하는 대규모였고 그 중에 역관은 13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서울을 출발하여 의주, 책문, 심양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데 그 시간이 5~6개월, 2000리에 이르는 대장정이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이들 사신의 행차, 즉 사행의 경비를 쌀·포·종이 등을 지급했는데 이것을 무역하여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고 그에 대한 권한을 역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 허용된 무역량이 인산 80근, 8포였으며 이는 은으로 2천 냥, 쌀 2천 석에 해당하는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가는 곳마다 중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가져온 인삼과 종이, 면포 등을 중국에다 팔았고 중국에서는 비단과 문방구류, 약재류, 가죽 제품을 조선의 사행에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중국과 무역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을 통해 중국의 교역품을 얻곤 했는데 그 중개무역인의 역할을 역관이 맡았으며 그들은 왜관을 통해 두세 배의 차익을 남기기도 했고 당시 홍삼 1근은 은 100냥이었는데 중국으로 가져가 350~700냥에 팔기도 했으니 역관은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러한 역관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외교에서도 크게 활약하였습니다. 선조 때의 역관 홍순언은 당시 중국에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의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어 이를 바로 잡았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나라의 지원병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종 때의 역관 김지남은 자신의 아들 김경문과 함께 백두산 정계비 세우는 일에 관여하는 등 우리나라 역사의 굵직한 사건 뒤에는 역관이 자리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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