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은 정말 모반을 꾀했나.

2022. 12. 26. 08:1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조선 시대 전주에 살던 정희증의 부인이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즈음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꿈속에 정중부를 보게 되었고 그는 이 일로 찜찜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역시 그 아이가 태어날 때도 비슷한 꿈을 꾸어 친구가 아이를 낳아 축하해 주었을 때도 수심이 얼굴에 가득찼다고 합니다. 이후 이 아이가 자라나 7~8세가 되었을 때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까치 새끼를 잡아 주둥이에서 발까지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었는데 이를 안 여종이 사실대로 희증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에 아이는 앙심을 품고 여종의 부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여종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후 여종의 부모가 와 통곡하니 아이는 오히려 ‘내가 한 짓이니 괴이하기 여기지 말라.’는 말을 하여 주위를 섬뜩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 희증은 아이가 15~16세가 되었을 무렵 현감이 되었는데 아이가 따라와 고을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아전 또한 아이의 말을 따르게 되니 훗날 이 아이는 조선시대 최대의 옥사사건의 중심이 된 정여립입니다. 
 ‘정여립은 대동계원을 모아 치밀하게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탄로 나고 조정에서는 즉시 체포령을 내린다. 정여립은 죽도로 도망쳐 그곳에서 자결했다 ’ 『조선왕조실록』
정여립이 사건이 중심에 선 기축옥사를 통해 처형당한 사람은 1000명이 넘습니다. 조선의 4대 사화를 통해 희생된 이들을 합한 수보다 많습니다. 명망 있는 학자에서 이름 없는 백성들까지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연관되어 고문을 받았고 숨졌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곤혹을 치루었습니다. 그럼 정여립은 그의 태몽과 어렸을 적 행적과 더불어 문제가 많았던 범죄자적인 인물이었을까. 
정여립은 전북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에서 태어나 22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의 학유, 예조좌랑, 홍문관수찬 등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실록에서는 당시 임금인 선조에게 정여립이 미움을 산일을 기록하였는데 정여립이 자신을 천거한 이이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정여립의 입장에서 학문적 이치를 다른 점을 지적한 것이었으나 선조는 이에 대해 스승인 이이를 비판했다고 면전에서 모욕을 주고 이를 기회로 반대세력인 서인들이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정여립은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낙향하여 살았습니다. 
그럼 과거에 합격한 그의 학식수준은 어떠했을까. 『대동야사』에서는 “정여립은 넓게 보고 잘 기억했고 논의가 격렬해서 거센 바람이 이는 듯 했다.”고 했으며 그의 스승 이이는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는 극찬을 하였습니다. 정여립은 극악무도한 심성과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이중적이며 미스테리한 인물이었을까.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정여립이 한 이 말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말이었으나 조선정부에서 보면 현 체제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리는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정부가 두려워했던 것은 그의 말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낙향했지만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진안군 죽도에 서당을 차리고 학문을 가르쳤는데 천민이든 승려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그와 동시에 무예도 가르쳤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여립은 문무를 갖춘 인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는데 그 힘이 대단하여 1587년 정해 왜변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청하니 하루 만에 군사를 모아서 왜구를 격퇴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지방관이 도움을 청했을 정도면 대동계는 비밀스런 조직이 아니라 알만한 사람은 알 수 있는 이름 있는 조직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동계에 대해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선조 23년 정월, 전라도와 항해도에서 일시에 군사를 일으켜 한강까지 올라가 서강창을 습격, 군량미를 확보한 뒤 홍제원에 진을 친다. 팔도 물산이 올라오는 수로를 차단하고 성 안에 자객을 들여보내 병조판서와 금부도사를 죽인다. 그리고 민심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성안으로 진입한다.’ 『조선왕조실록』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목자망(木子亡) 존읍흥(尊邑興)’ 즉,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가 새로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그와 맞물려 들통난 정여립의 거사계획은 정여립을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사전에 발각된 이 계획으로 인해 체포령이 내려지고 그는 성판서굴이라는 작은 굴에 들어가 스스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한양으로 옮겨져 역모의 주동자로 능지처참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은 그가 자결하고 나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정여립의 거사를 들었을 때 이를 바로 믿지 않았고 한양에 올라와 결백을 이야기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조정에서는 정여립의 난을 기정사실화합니다. 이 일로 인해 정여립과 함께 시국을 비판한 사람은 물론 정여립과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의 형제와 부모들에게까지 역모죄를 물었습니다. 호남의 대유학자 정개청이라는 사람은 정여립이 집터를 봐준 것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일을 들어 역모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그와 주고받았던 편지글 속에 ‘도를 아는 건 당신’이란 문구는 이를 부추겼습니다. 정개청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유배당한 뒤 두 달 만에 죽었고 그를 따르던 제자 50명이 죽고 20명이 유배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관련된 4백 여명이 과거응시자격이 박탈당했습니다. 그리고 학식이 높았던 최영경은 정여립의 부하 길삼봉과 동일인물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사당했고 정여립과 친분이 있던 전라도사 조대중은 다른 곳으로 떠나면서 자신이 아끼던 기생과 헤어지는 것을 슬퍼 눈물을 흘린 것이 화근이 되어 역모죄로 고발되었으니 정여립의 자결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엄청난 희생을 몰고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이순신도 연루되었으니 아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역모죄는 조작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시각입니다. 당시 치열한 당쟁 속에서 그는 정국은 동인의 주도하에 있었는데 그는 이들과 가까웠으니 역모를 꾀할 이유가 적습니다. 그리고 체포령이 내려졌을 때 근거지인 죽도로 숨어들었다는 점, 역모죄가 임금의 귀에 들어가 있을 적에는 아들과 수하 한 명을 데리고 덕유산을 거쳐 죽도에서 단풍구경을 했다는 점, 대동계를 통해 왜군을 무찔렀음에도 불구, 별다른 저항 없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 그리고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대부분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정여립이 과연 역모를 꾸몄는가 갸우뚱하게 합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었는데 선전관과 현감 민인백이 군사를 데리고 포위하여 그를 때려 죽였다.’ 『동소만록』


이 기록을 정여립이 타살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10여 년간 정국을 주도해온 동인에 타격을 주기 위해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조작하고 이후 선조가 임명한 수사총책임자 송강을 무고한 사람들을 사건에 연루시켰다는 이유로 강계로 유배보냅니다. 당쟁에 불편함을 느낀 선조가 역모사건을 조작하여 동인과 서인에 타격을 준 것일까요.  어쩌면 정부의 무기력한 대처와 선조와 부족한 리더쉽과 비교하여 왜구를 관군이 오기 전에 왜구를 퇴치한 대동계와 이를 이끈 정여립에 민심이 쏠리는 것을 선조는 두려워했는지 모릅니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나.’
그는 조선시대에 시대를 앞서나간 선각자였지만 당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왕조는 정여립을 역사 속에서 지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한 것은 반란이 아닌 왜구의 침략을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한 그만의 조처는 아니었을까요.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3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3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기축옥사를 일으켜 엄청난 희생을 야기시킨 당시 조선기득권층의 무지함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