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무의 대마도정벌

2022. 12. 28. 08:1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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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해외군사원정은 몇 차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루어지더라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나 조선 후기에 있었던 나선정벌처럼 주변강대국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전기 세종시기에 우리의 뜻으로 해외군사원정을 했던 적이 있으니 바로 대마도 정벌이었습니다. 그럼 조선은 왜 대마도에 대한 정벌을 해야 했을까. 왜구는 고려말 조선 초기에 한반도와 중국의 해안을 침략하며 괴롭혀왔고 이러한 왜구의 침략이 500여 차례에 달할 정도로 골칫덩이었습니다. 이에 세종은 대규모 원정함대를 구성하고 왜구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합니다. 쓰시마섬 혹은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 49.6km, 일본 후쿠오카에서 134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가까운 섬입니다. 단지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왜구가 한반도 해안에서 기승을 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마도를 비롯한 왜인들은 고려하고 무역을 하곤 했는데 여몽연합군 원정 이후 무역길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이 대마도란 섬이 97%가 산지일 정도로 척박합니다. 특히 흉년이라도 들게 되면 그 피해가 막심하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국인 고려 및 조선, 그리고 명나라 해안에 등장하여 약탈을 자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독자적으로 대마도 정벌을 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당시 국제정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명나라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해금정책을 폈는데 1371년 홍무제가 왜구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외국과의 교역 및 해외 도항을 금한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쓰시마 배의 해안 접근과 사무역이 금지되었고 약탈과 사무역에 의존한 쓰시마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1년에 1~2차례 오는 견명선에 무역을 의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왜구는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왜구는 조선과 명나라의 넓은 범위에 출현하였으며 당시 명나라 실권자인 주원장은 이들 왜구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과 결탁할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건의를 하였습니다. 
‘짐이 병선 1만 척을 내어 토벌하고자 한다. 너희 조선도 이를 미리 알아둠이 마땅하겠다.’  『태종실록』
조선 입장에서는 명나라가 왜구토벌을 위한 군대를 일으킬 경우 여몽연합군 때처럼 조선에 상당한 부담을 지울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마도에 대한 조선의 정벌이 먼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종 1년인 1419년 세종은 비상소집령을 내리고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 조선 수군의 주력군을 거제의 견내량에 결집시켰습니다. 이곳은 상당히 좁은 바다로 ‘량(梁)’이라는 단어가 물살이 급하고 협소한 지형이 붙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대규모 수군을 결집시킨 이유는 이 곳에 25개의 산성이 있을 정도로 왜군과의 교전이 치열한 곳이고 조류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해류를 이용하여 쉽게 대마도로 갈 수 있는 출발지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기에 모인 수군은 227척의 전선에 1만 7285명의 병력으로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의 수군이 차출되었고 65일분의 식량분을 지닌 규모가 큰 원정군대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원정이 있기 전에 세종은 포구에 주둔한 전함을 폐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말린 것은 이종무였습니다. 


‘우리나라가 바다에 접해 있으니, 전함이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함이 없다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세종실록』
그리고 이러한 조언이 있고 난후 충청도 비인에 침략한 왜구가 전사자 300여 명을 내고 40여 명에 이르는 사람을 잡아가는 노략질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조정을 경악케 하였고 정벌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대마도를 왜구의 근거지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대마도 도주 소 사다시게가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가 뒤를 이었는데 소 사다모리가 어려 실권을 해적 두목인 산미타라가 장악하고 있었고 당시 대마도에 기근이 들어 대마도는 왜구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태종과 세종의 집권 당시 수군 향상을 위한 방안들과 상소가 태종과 세종 시기에 줄을 이었으니 이러한 점을 수용하여 군사 훈련과 무기 향상, 선박 건조를 진행했을 것이며 이러한 시스템이 바탕이 되어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는 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벌계획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부산포와 내이포의 왜관을 폐쇄했으며 왜인들과 왜구의 연락도 끊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591명의 왜인들을 감금했습니다. 혹시나 모를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다음 조선은 대마도 도주에게 조선에서 약탈을 자행한 해적들을 체포해서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출정의 빌미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원정으로 인해 국내의 군사적 요충지에 군사를 두어 방어에도 힘썼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준비를 하고 대마도 정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벌의 길에는 조선으로 귀화한 왜인을 길잡이로 두었습니다. 


1419년 6월 20일 대마도에 조선군이 내렸습니다. 이에 왜인들은 무척 당황하였는데 처음에는 대마도의 왜인들이 요동으로 갔던 왜구들이 돌아온 줄 알고 술과 고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군은 왜인들을 수색했고 이 과정에서 적선 129척을 빼앗고 중국인 포로 131여 명을 구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종무는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본격적인 대마도 정벌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종무의 조선군은 쓰시마 해안을 봉쇄하고 앞서 두지포와 훈내곶에 상륙한 데에 이어 6월 26일에는 니로군 지역에 상륙했습니다. 하지만 대마도의 지리에 어두운 조선군은 적의 매복에 걸려 180여 명의 전사하는 대마도 정벌의 유일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14일 간의 원정으로 조선은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대마도주가 조선군의 철군을 요청하며 선린관계를 다짐한 것입니다. 이에 이종무의 조선군은 8월 4일에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조선의 속주가 되거나 대마도를 비우고 일본 본토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마도주는 조선에 심복(心腹)이 될 것을 약속하면서 원정 때 포로가 된 조선군 4명을 보냈습니다. 이후 1436년 식량 사정이 어려워져 대마도주가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달라는 상소를 올리고 이 때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대마도주의 아들 소 시게요시는 조선의 관직인 종일품 판중추원사 겸 대마주도제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관직을 받은 대마도주는 왜구의 난립을 막는 대신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모든 선박에 대한 문인 즉, 도항증명서를 발행하는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 시기에 정말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가 되었던 것일까. 조선 초기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 해답이 있는데 이 지도는 「조선팔도도」와 일본지도, 그리고 중국 지도과 아랍의 지도를 합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도에는 조선의 남해안에 대마도가 표시되어있는 반면 일본의 지도에는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조선에 대한 지도에도 대마도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조선 중기까지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였던 셈입니다. 이후 이 대마도가 일본의 영토가 된 것은 메이지 유신 때라고 합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정벌은 명나라의 원정을 막은 조선의 선제정벌이었으며 이 정벌로 인해 대마도는 한동안 조선의 영토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로 고려말부터 이어진 왜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벌을 지휘한 이종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일찍이 무예를 익혀 왜구를 여러 차례 막아내니, 적을 잘 제어한다는 명예가 높았다. 삼군을 통솔하고 섬 오랑캐를 토벌하였으니, 그야말로 간성(干城)의 장수요. 우리 사직(社稷)의 신하이다.” 『세종실록』 세종 7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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