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뭉쳐 이루어낸 승리 진주대첩

2022. 12. 30. 08:2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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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많은 전투 중에 우리에게 빛나는 전투 중에 하나가 바로 진주대첩입니다. 일본군 정예병 3만을 상대한 조선군은 3천 8백 여명에 불과했고 아군은 관군과 백성들을 합친 숫자였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승리는 일본을 여러모로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단 이 전투는 임진왜란을 진행한 일본군에게 있어 처음으로 겪는 대참패였고 전쟁을 계획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목소(木曾)의 목을 베어오라`고 명령했는데 목소는 목사를 뜻하는 말로 바로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진주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했고, 전라도는 일본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분함을 느꼈던 일본은 8개월이 지난 1593년 다시 7만에 다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하고 패배를 설욕합니다. 이 때 진주성에 있던 6만의 군과 민이 몰살당했는데 이것은 1차전 일본군 패배에 대한 분풀이였습니다. 당시 장마철이라 성곽은 약해져 있었고 왜군은 성곽 밑 부분돌을 빼내어 성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무너진 곳으로 왜군이 쳐들어와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하지만 2차전에서의 왜군의 피해는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이 싸움에서 10일간 지속되었고 그만큼 일본군의 피해도 컸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으나 1만에서 3만 8000명에 이른다는 이야기도 있고 희생이 컸던 왜군으로서는 전라도로 진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럼 1차전의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매우 불리했습니다. 하지만 1593년 명나라의 참전하여 평양성을 회복하였고 여러 곳에서 조선군은 의병과 합쳐 활약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승리는 진주전과 행주대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은 9월 24일에 김해에서 출발하여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해권을 이순신의 조선에게 내주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에 일본은 진주를 함락하여 이를 토대로 호남을 침략, 군량비를 확보하고 장기전에 대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경상도의 일본군과 한성에 있던 병력 중 일본군 일부가 합세하여 진주성으로 향합니다.

‘진주는 남쪽 지방의 거진으로 양도의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적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 『선조실록』
그리고 김성일은 1차 진주대첩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김해에 머물러 있던 적 3만여 명은 9월 24일 삼군으로 나뉘어 노현의 군을 습격하고 27일에는 또 창원부를 침범하였사온데, 병사가 두 번이나 패해 전후에 죽은 자가 무려 1400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군사들은 기운을 잃었사오며 사민(백성)은 무너져 흩어졌사옵니다. 적의 무리는 이긴 기세를 타서 그 세력이 마치 풍우(비바람) 같사와 이달 2일에는 함안을 함락하고 5일에는 선봉 왜적의 기병 1000여 명이 곧장 진주 동쪽인 마현 북쪽 봉우리에 이르러 형세를 살피고 마구 달려 군세가 요란하였습니다.’ 『학봉집』
 이를 막기 위해 유숭인과 군사 2천 명이 분전했으나 진주성 앞까지 몰려온 왜군과 싸우다가 전멸당했습니다. 김시민은 유숭인과 조선군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열어줄 수 없었습니다. 이 틈을 타 왜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유숭인과 그를 따른 조선군대는 사실 희생에 가까운 싸움이었습니다. 목숨을 바친 그의 싸움으로 일본군도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을 것이며 진주성 안에서는 어떻게 이 싸움에 대처할 것인지 시간을 벌어다 주는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왜군은 적의 기병 1천 여명이 요란하게 질주하였는데 이는 조선군을 겁먹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김시민은 단 한 발의 화살도 낭비하지 말라고 하였고 깃발을 많이 세워 나부끼게 하는가한편 여인들을 남장을 시켰습니다. 이러한 것은 숫적 열세에 있던 조선의 위세를 과장시키려는 심리적인 작전이었습니다. 

김시민은 이 전투에 대해서 대표에 사용할 화약, 염초 510근과 총통 170자루를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진주성에는 다양한 대포가 있었습니다. 지자총통은 사거리가 800보, 이는 1km에 달하는 사거리의 200여 개의 조란탄을 발사하는 화약무기입니다. 화약을 잰 지자총통에 수백발씩 넣어서 발사하는 둥근 공 모양의 탄환이 조란탄으로 마치 새의 알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것을 발사하면 수백 개의 작은 탄환이 날아가 많은 적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이 외에도 약 16km의 사거리를 가진 천자총통과 1km에서 1.9km까지 발사하는 현자총통 등 진주성은 대형 화기가 있던 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주성의 군사들은 개인화기가 있었으니 바로 승자총통이었습니다. 이 때 김시민이 제작하도록 한 총통 170자루가 바로 승자총통으로 이 무기는 37g의 화약을 사용하여 15개의 철환을 발사할 수 있었고 조준거리는 600m 정도로 일본이 가진 신식 무기 조총에 비해 3배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진주성 싸움에 4500정 정도의 조총을 가지고 싸웠고 성능도 우수했습니다. 다만 사거리는 승자총통이 더 길기 때문에 이 무기가 왜군의 진주성 접근에 제약을 걸었을 것이고 진주대첩에서 크게 활약했지만 조총의 위력을 확인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조총을 조선군의 주력화기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주대첩에는 비격진천뢰가 조선의 무기로 사용되었는데 이 무기는 선조 때 이장손이 발명한 일종의 시한폭탄이었습니다. 2차 경주성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것 한 방으로 성을 탈환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진주성은 평지보다 높은 곳에 있는 성으로 성의 남쪽은 남강이 있고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의 있어 천혜의 요새입니다. 또한 진주성은 기존의 성 외곽에 토성으로 외성을 쌓았고 그 바깥에는 해자를 파고 물을 채웠다고 합니다. 이는 성을 방어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도록 지시했는데 다른 지방에서는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진주성은 의도대로 방어체제를 갖춘 것입니다. 
진주성의 철저한 대비가 진주대첩의 첫 번째 요인이었다면 두 번째는 심리전입니다. 일본군은 전국에서 납치한 아이들로 하여금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고, 8도도 무너졌으니 진주성도 항복하는 것이 좋소."하며 외치게 했고 이뿐만이 아니라 ‘개산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가 죽는다. 그 대가리를 깃대 위에 달 것이다.’라 하니 개산아비는 바로 선봉대의 장수를 말합니다. 주력부대가 준비중이니 각오하라는 이러한 외침은 김시민은 절대 동요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성 곳곳에 활을 쏘는 듯한 허수아비를 배치시켜 적을 교란시켰으며 전투 3일째에는 악공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여 아군들에게는 심리적 안정감을 적군에게는 안정된 군대가 있다는 위압감을 내비친 것입니다. 여기에 바깥 의병들의 지원도 심리적으로 왜군들을 지치게 했습니다. 의병장 최강은 경남 고성에서 달려와 망진산에 올라 횃불을 켜서 조선의 지원군들이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교란케 했으며 이것은 마치 초나라 군대가 한나라 군대에 둘러싸여 초나라의 노래를 듣는 듯한 사면초가의 형태가 되어 사기를 떨어뜨린 것입니다. 그 누군가는 1차 진주성 싸움에는 이러한 외부 지원이 있었지만 2차 싸움에는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승패의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하였습니다. 


6일간의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민과 관이 하나가 되어 이룬 이 승리로 왜군은 지휘관급 300여 명이 사망하고 1만의 병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전투의 마지막 날 김시민은 왼쪽 이마에 탄환을 맞고 두달 뒤 순국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당시 김시민의 죽음을 몰랐는데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일본은 승리한 후 ‘조선의 맹장, 목사’라고 하여 서해원의 목을 베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김시민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 김시민에 두려움과 1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일본의 패배는 생각보다 충격을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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