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정유재란 현장 도산성 전투

2023. 1. 1. 08:2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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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연합군이 울산성을 포위해 가토가 이끄는 왜군을 고립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울산성 전투도’ 병풍.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되면서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의 재침으로 이루어진 전쟁이었습니다. 1597년 8월에 시작된 전쟁은 이듬해 12월까지 지속되었으며 일본은 임진왜란에 있었던 과정을 교훈 삼아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고 한양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의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보급로를 탄탄히 하기 위해 실행된 전라도 공략에 성공한 일본은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일본군은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명량해전에서 대패하고 보급로의 단절을 우려한 일본군은 직산전투에서도 패하며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군은 한반도 남해안에 성을 쌓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명연합군이 이렇게 쌓여진 왜성을 전쟁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시 왜군을 공략하기 위해 경상도 공략론과 전라도 공략론이 나왔는데 전라도 순천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경상도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상도를 공략하기로 하는데 일본과 가깝고 상륙지역할을 하는 부산이 경상도에 있었고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한 울산성을 공략하여 승리하면 왜군의 기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유재란의 최대의 격전지로 알려진 울산의 도산성 혹은 울산왜성은 울산 중구 태화강 하구에 자리한 성으로 당시 성을 쌓고 물길에 둘려싸여 섬처럼 보인다고 해 도산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당시 동북아 최대의 국제전투이자 7년간의 임진왜란의 종지부를 찍는 육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이곳을 점령하려고 했고 왜군은 이곳을 사수하려 했습니다. 
울산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한 성으로 알려졌습니다. 1597년 전쟁 중이었으니 급하게 지어졌고 당시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진 만큼 전투를 지휘하는 천수각이 확인되지 않았고 성벽들만 간간히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때 성의 완전한 모습을 남아 있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성을 일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성은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한 오사카성, 161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쌓은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 3대 성 중 하나인 구마모토성으로 이 성을 쌓은 이가 바로 1607년 가토 기요마사입니다. 가토는 이 성을 쌓을 때 무려 120개의 우물을 팠는데 그것은 그가 겪었던 정유재란 당시의 경험 때문입니다. 울산왜성에 있을 무렵 그는 조명연합군에 둘러싸여 식량과 물 보급에 큰 차질을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일본군은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셨고 심지어 오줌도 먹었습니다. 성안에 갇힌 왜군은 종이와 벽의 흙도 끓여 먹었으며, 성 밖으로 나와 시체를 뒤져 양식을 찾아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식량도 조총수에게만 배급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루에 생쌀 한홉뿐이었으므로 왜군이 겪었던 식량사정은 엄청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울산성 안에는 우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12월, 일본군은 물을 구하기 위해 추위를 뚫고 조명연합군의 경계망을 뚫고 태화강으로 물을 구하러 가야 했습니다. 
‘다리가 점점 야위어 각반을 차자 자꾸 발쪽으로 내려간다.’ 『조선물어』
기록은 일본군이 얼마나 심각한 식량난에 처했는지 알려줍니다. 당시 기요마사는 처참했던 울산성 안에서의 생활이 자신이 만든 성 안에 120개의 우물을 파도록 했으며 지금도 17개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쌓은 것이 구마모토성, 아마 이 성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쌓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구마모토성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은 ‘울산정’(蔚山町)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울산지역의 도기들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구마모토성은 공격하는 군대가 쉽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급경사의 성벽을 쌓도록 했는데 아래에서 들여쌓기하다가 위에서 수직으로 쌓아 사다리로 진입을 어렵게 한 것입니다. 아마 구마모토성을 통해 울산왜성을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생각하면 울산성 전투에서의 경험이 구마모토성을 건축하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군으로 왔던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그린 당시 울산왜성의 참상, 군마를 잡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울산성 전투는 조명연합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군은 도원수 권율장군이 있었고 명군은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가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공격으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왜군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담은 기록으로 일본군의 종군승려로 참여한 케이넨이 남긴 기록이 있으며 이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1597년 7월 29일 해변에 시체로 산이 이루어졌네, 도대체 어디까지 계속될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구나. … 8월 5일 적국인 전라도라고 하지만 검붉게 타오르는 연기는 마치 이런 상황에 분노하는 듯하구나’
그리고 케이넨은 울산성전투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침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대포 소리가 연달아 들려와서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물으니 적군이 기습을 했다고 한다. 적군은 돌담 밑에서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댄다. 성 안에는 물건들이 수없이 많은데, 침구와 의복, 재물 그리고 보석 등을 담은 상자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그 불 때문에 많은 인부와 무사들이 타 죽었다.’
‘드디어 아군은 물도 식량도 떨어졌다. 성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밤새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그 마음을 읊는다.‘
이 때 즈음에 가토 기요마사는 다른 장수에게 서신을 보내며 자신의 할복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구원병이 도착합니다. 나중에는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까지 합류하여 6만 이상의 구원병이 왔으므로 조명연합군은 이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조명연합군은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경주 쪽으로 물러났습니다. 13일간의 전투로 조명연합군은 5800명, 일본군은 6000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서로가 입었습니다.
당시의 치열했던 전쟁 모습은 이 전투에 참전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회고에 의해 그림으로 그려졌으며, 병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병풍도는 1차 도산전투를 그린 것으로 원본은 사라지고 17~18세기 무렵 제작된 모사본 3점이 일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산전투도는 각각 6폭씩 3점의 병풍에 그렸는데 첫 번째 병풍에는 조명연합군이 왜군이 주둔한 도산성으로 진격하는 모습을, 두 번째 병풍에서는 조명연합군이 왜성을 포위하는 모습을, 세 번째 병풍에는 일본의 지원군 합세로 조명연합군이 후퇴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성곽이 비스듬한 것이 특징인 왜성의 모습. 사진은 정유재란 말기 가등청정이 거의 전사 직전까지 몰렸던 울산왜성.

울산성 전투는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으로 조명연합군의 철수로 일본군이 승리한 전투로 볼 수 있지만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스스로 이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음을 실감해야 했습니다. 일본 장군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울산, 순천을 유지할 수 없으며 서생포와 사천까지 퇴각할 것을 촉구했으나 실제 현장에 있지 않았던 히데요시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며 장군들을 질책했습니다. 결국 정유재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왜군의 철수로 끝이 났으며 울산성전투는 조명연합군이 패배했지만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것은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이었습니다. 정유재란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남을 무조건 점령하려고 했는데 이는 보급의 의미를 넘어 이곳에 일본인을 이주시켜 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계획 아래 많은 조선인들이 살육되고 일본으로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왜군들은 조선인들의 코를 잘라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사실 우리는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에 이은 재침 정도로 이해하고 이 시기에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이 있었던 것으로만 기억하지만 실제로 정유재란의 피해는 임진왜란보다 더 컸고 그 과정도 참혹했습니다. 그리고 울산왜성 또한 조선인들에 의해 지어진 성임에도 불구,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덩달아 도산성 전투도 잊혀져가는 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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