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 동의보감이 세계 기록 유산이 된 이유
2022. 10. 25. 20:2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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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나라인 우리의 서적이 중국에서 출판된 것이 극히 드문데 유독 동의보감 25권은 중국에서 출판되어 아주 인기가 높으며 판본도 정묘하다. …… 나는 집에 좋은 의학서적이 없어 매양 병이 나면 동네 사방을 찾아 책을 빌려보았는데 지금 이 책을 보니 구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은전 닷 냥이 없어서 사지 못한 채 섭섭히 돌아왔으나 중국판에 나와 있는 능어의 서문을 베껴서 후일의 참고가 되게 하고자 한다. ”
이 글은 박지원이 중국에 갔다 오면서 쓴 저서인 『열하일기』 중 일부로 중국에서 간행되고 있다는 동의보감에 대한 구절입니다. 동의보감은 중국에서 꽤나 인기 있던 서적이었는데 무려 20여 차례 인쇄된 것입니다. 동의보감은 일본에도 전해져 편찬되기도 했습니다.
동의보감이라는 의학서, 그럼 동의보감이라는 책의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동의’라는 말은 동쪽의 의학을 뜻합니다. 단지 중국과 구분 짓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뒤에 그 자부심을 드러낸 것인데 바로 보감이란 말은 ‘보배스러운 거울’이란 의미로 중국의 어떤 주변국의 의학서적과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좋은 서적이기에 자신있게 동의보감이라 이름 지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의학이 어느 나라의 치료법인지 그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의학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의보감은 중국과 다른 조선의 독창적인 의학서적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의학에 있어서 조선의 의학도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해도 좋을 정도로 좋은 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의보감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의학서적을 다른 나라에서 가져다 쓰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의보감의 등장으로 한의학의 중심인 중국에서 이 책을 가져다 보게 된 것으로 그만큼 우수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허준은 1539년에 태어난 의학자로 동의보감을 만들게 된 것은 바로 당대 조선임금인 선조의 명을 받아 이 책을 만듭니다. 선조 대에 임진왜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국난으로 나라는 황폐화가 되고 그와 더불어 질병이 출현하는 등 조선에는 어려움이 가중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은 필연이었는지 모릅니다. 1596년 선조는 의서를 편찬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 작업에는 허준 외에도 정작,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선조는 편찬의도를 일러주면서 이들에게 수양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치료를 다음으로 할 것, 처방을 번잡하게 하지 말고 요점만 추릴 것, 우리나라 약명을 적어 백성들이 편히 쓸 수 있도록 하라고 명했습니다. 이들은 유교, 도교, 불교 등 각계 의학지식을 종합적으로 모아 집약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허준의 단독작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의주로 유배가게 되었는데 유배생활을 하면서 1610년에 책을 완성하게 된 것이 바로 『동의보감』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동의보감은 당시까지 전해지던 각종 의학지식과 더불어 궁중에서 소장된 방대한 양의 의학서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그러니까 허준이 혼자 연구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의학체계를 기록한 연구서라기보다는 당대까지 전해져오던 의학지식들을 총망라하여 이를 잘 간추려 만든 역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동의보감을 그저 잘 요약된 노트라고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실체를 좀 더 알고 나면 동의보감은 가치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저’라는 수식어를 붙을 만큼 의학지식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국판의 동의보간 서문에는 동의보감에 대한 가치가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중국판의 서문에서는 ‘동의보감을 보급하는 것은 천하의 보배를 나눠 갖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표현했을까. 동의보감은 옛 의학서적의 자료를 모아놓았지만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지 않고 요점만 제시하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빠진 내용이 없다는 것이 동의보감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또다르게 이야기한다면 또다른 서적을 뒤지지 않더라도 동의보감만 있더라도 사람을 구하는 데에 이만한 책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면 병과 증세를 찾다보면 그에 맞는 약재가 나오기 마련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약재가 어떠한 병증에 효과가 있는지 나와 있으며 침구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동의보감보다 방대한 수준의 책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에 있어서는 동의보감에 비할 바는 못됩니다. 단연코 동의보감은 당대 동아시아의 의학지식을 총망라한 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의보감의 서문에 보면 ‘수양(修養)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치료를 다음으로 하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치료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예방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유가의 가르침이 널리 전해지면서 자연스레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持傅母)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사대부들로 하여금 양생에 대한 기본지식을 가지게끔 요구하였고 이는 동의보감의 서문을 쓴 사람이 바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 이정구라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서문 같은 경우는 저자 자신이 직접 쓰는 경우도 있지만 당대 해당 분야의 최고의 권위자가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정구라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썼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사서삼경만 읽고 이해하는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질서를 유지해야 했던 이들은 많은 분야에 대해 대략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의학도 포함되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의학시설이 대중적으로 발달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스스로 해결해야 되는 부분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효를 실천덕목으로 했기에 사대부들은 스스로 약을 짓기도 했습니다. 동의보감처럼 영생을 이야기하는 의학서적은 더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옮겨적는 수준이었습니다. 동의보감은 기존의 양생과 의학적인 면에서의 연계성을 찾아 결부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동의보감은 기존의 의학서가 가지고 있던 자질구레한 양생에 대한 설명을 잘 축약시켜 동의보감이 갖는 가치를 더욱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동의보감이 가지는 가치는 이 서적이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계기록유산의 등재 신청서는 “그 기록물이 왜 세계인들이 함께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것은 바로 “공공의료와 예방의학의 이상을 선포한 국가의 혁신적인 지시에 따라 편찬된 책”라는 것입니다. 세계가 공공의료에 대한 고민을 하던 시기가 19세기인데 동의보감은 이에 2세기가 앞서 만들어진 책입니다. 동의보감이 세계 기록 유산이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공공의료정책을 국가적으로 실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발간된 책이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1차 진료자가 될 수 있게끔 하는 데에 있습니다. 2009년 당시 『동의보감』이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자 당시 중국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중국은 2011년에 『본초강목』과 『황제내경』을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시켰고 그러면서 『동의보감』은 이들의 아류작이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방해공작에도 『동의보감』이 세계 기록유산으로서 가지는 가치에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윙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공공의료의 실천, 즉 일반 백성들의 건강과 안녕에 대한 책임감에 원천을 든 의학서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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