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빙고에 단긴 건축과학과 그에 따른 백성들의 고충

2022. 10. 23. 20:1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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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

지금은 얼음은 집에서도 냉장고를 열면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달랐습니다. 얼음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와도 연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다음 해 여름에 쓰도록 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505년(지증왕 6) 11월에 처음으로 소사(所司)에 명해 얼음을 저장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얼음을 저장하고 이를 관리하는 빙고전이라는 기구도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여 여름이 다가올 때 즈음이면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하며 민간인의 장빙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1243년 최의가 백성들을 동원하여 빙고에 얼음을 저장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에 동빙고와 서빙고를 만들어 얼음을 보관했으니 동빙고에는 국가제사용 얼음을, 서빙고에는 왕실과 고위관료들이 쓸 얼음을 저장했습니다. 특히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형 월산대군은 관영 빙고를 뛰어넘는 개인용 사빙고를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지역사업들은 장빙과 관련된 일을 하였고 고깃배에 얼음을 채워 영업을 하여 사시사철 싱싱한 생선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고 쇠고기를 파는 현방이나 돼지고기를 파는 저육전에서는 이러한 얼음을 이용하여 저장기간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얼음은 부와 연결되는 것은 당연하였으니 실록에는 얼음을 도둑질한 내용도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18세기에는 석빙고보다 기능이 떨어진 목빙고를 이용하여 5만에서 9만 톤을 저장하기에 이르렀고 다음 여름에 그 중 3분의 1만 남아있었다고 가정해도 30만 명되는 서울인구의 한 명은 연간 70~100kg에 가까운 얼음을 소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도 이러한 양을 소비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의 탁월한 얼음 저장기술, 즉 열을 차단하여 얼음을 보존하는 아이스박스를 잘 만드는 능력이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술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석빙고입니다. 

동빙고 터 표지석. 1998년 세워진 표지석엔 “조선시대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제사 때 쓰던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 터로 연산군 10년(1504) 동빙고동으로 옮겨졌음”이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경주의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였다는 지증왕대의 『삼국사기』 기록과 함께 경주에 있는 이유로 신라 때 만들어졌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현재 경주에 있는 석빙고는 남한최대의 석빙고로 35형 규모로 조선 영조 1738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곳의 한여름의 바깥기온과 석빙고 안의 기온을 재면 20도 이상 차이난다고 하니 석빙고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석빙고는 어떠한 원리로 여름까지 얼음을 보관할 수 있었을까. 
얼음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열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생긴 모양새는 마치 봉분과도 같은 둥근모양입니다. 겉면에는 흙을 두텁게 깔았고 잔디를 심었으니 햇빛을 차단하고 굴뚝을 내어 더운 바람이 빠져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봉분의 모양으로 더운 바람이 들어오면 이러한 모양을 따라 타고 넘어가도록 하고 안으로 들어온 공기들도 찬바람은 돌고 더운 바람은 위로 올라가게끔 하였습니다. 석빙고의 출입문을 남쪽으로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람을 맞되, 출입문 위로 벽을 두어 찬바람은 들어오고 더운 바람은 차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석빙고는 열손실을 줄이기 위해 반지하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운반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특이할만한 것은 석빙고의 바닥 경시도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배수로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실내를 건조하게 하여 얼음을 잘 녹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석빙고의 천정에는 홍예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인데 이러한 홍예 사이에는 움푹 들어간 빈공간이 있습니다. 일종의 에어포켓입니다.. 이 공간이 없으면 더운 공기가 이동하면서 얼음을 녹일 수 있기 때문에 석빙고 기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석빙고의 얼음저장기능은 건축 재료에도 숨어 있습니다. 큰 화강암을 사용하였는데 이렇게 큰 돌은 비열이 커서 빨리 식지 않습니다. 석빙고 이전에는 목빙고가 있었습니다. 석빙고가 목빙고보다 기능이 탁월했던 것은 바로 돌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음을 보관할 때에도 그냥 보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볏짚을 사용한 것입니다. 볏짚의 양에 따라 다음 해까지 얼음이 상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지어진 석빙고는 강이나 하천을 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지형으로 얼음을 쉽게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석빙고 뒤에는 산이 없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겨울철의 북서계절풍이 맞이하기 위한 것으로 석빙고는 사람의 살기 위한 최적지의 반대쪽에 위치한 것이었습니다. 
'빙실은 백성의 근심이요 참으로 폐단이었다. 삼년마다 한 번씩 백성의 재력을 써서 고쳐야 했다. 진흙과 짚 대신에 석재로 대신하려 해도 많은 비용이 문제였다. 다행히 판관 유명악이 민폐 개혁을 위해 감영미 800섬을 원조받아 공사를 시작하니 처음은 돌을 쌓아 바닥을 만들고 무지개형으로 지붕을 덮으니 대략 9칸으로 일을 마쳤다. 맹춘(孟春, 1월) 중순에 시작하여 수하(首夏, 4월) 그믐에 완성하였다.‘
이것은 대구의 석빙고를 건립한 판관 유명악의 공을 기리는 글입니다. 이전에는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로 흙을 사용하였으며 이름도 빙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능이 떨어져 오래가지 못했고 몇 년마다 백성들이 돈을 내어야 했고 수리를 해야 했음으로 얼음으로 호사를 누리지 못하는 일반백성들이 느끼는 고역은 더 컸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이전보다 발달된 형태인 석빙고의 등장은 그나마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었을 것입니다. 
‘고려 의종 때 맹동과 입춘에 얼음을 저장하거나 춘분에 얼음을 꺼낼 때 사한단에서 제사한다.’ 고려사 권 63


하지만 여전히 얼음을 채취해서 옮기는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역이었습니다. 지금보다는 방한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간원에서 얼음채빙과 저장에 백성들이 힘들어했다며 상소가 올라올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이 부역을 피해 남자들이 도망가다보니 빙고과부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부역이 줄이기만 할 뿐,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만큼 얼음저장은 중요한 국가사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왕들은 빙고를 관리하는 군사들에게 술과 먹을 것을 하사하기도 하였지만 관리를 소홀히 하면 벌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관된 얼음은 여름에 음식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전현직 고관들에게 지급되었는데 이들에게 얼음을 받을 수 있는 패를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패를 가서 서빙고에 가서 얼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얼음을 주는 대상에는 관리와 더불어 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례가 길었던 조선시대에는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얼음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아주 옛날에 얼음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얼음을 조각하여 집안에 두며 시원함을 만끽하기도 했으며 얼음을 여자형상으로 조각한 빙낭, 그리고 얼음을 병풍처럼 만들어 더운 여름을 달래기도 하였으며 아예 얼음으로 방에 차갑게 만든 냉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일부 권력자들의 사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호사 뒤에는 얼음을 채취하고 운반하기까지 그 힘듦을 감당해야 하는 백성들의 노고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빙이라 하여 이는 여름철에 쓰는 얼음을 말하는데, 이는 백성의 눈물이 얼어붙은 것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석빙고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과학이 담긴 건축물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은 친환경 냉장고이자 현대에서도 되새길 만한 초대형 아이스박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담긴 역사는 과학과 지혜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몰랐던 얼음의 가치와 엄청난 고역을 제공하고도 그에 상용한 백성들의 노고도 생각하게 합니다. 석빙고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역사를 품고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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