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장수 사야가는 왜 김충선이 되었나.

2022. 10. 20. 20:4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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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도착한 부산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긴 벽보들이 나붙었습니다. 
‘아아.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은 나의 이글을 보고 안심하고 직업을 지킬 것이며 절대로 동요하거나 떨어져 흩어지지 말라, 지금 나는 비록 다른 나라 사람이고 선봉장이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마음으로 맹세한 바 있었으니, 그것은 나는 너희의 나라를 치지 않을 것과 너희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내 일찍이 조선이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듣고 오랫동안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면서 한 번 와서 보기가 소원이었고, 이 나라의 교화에 젖고 싶은 한결 같은 나의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적장이었던 일본의 장수가 써 붙인 내용입니다. 선봉장에 선 장수가 쓴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이상합니다. 내용은 조선에게 선전포고하는 내용이 아니고 침략한 군대가 침범할 뜻이 없음을 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내용을 적게 한 장수는 자신의 부하를 통하여 경상병사 김응서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편지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섬나라 오랑캐에 불과한 오래전부터 조선의 문화를 좋아하고 학문을 숭상하였습니다. 조선에 도착하여 문물을 직접 보니, 조선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뜻을 함께하는 부하 3천 명을 거느리고 장군님의 진영에 투항하려 하니 부디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편지를 보낸 이는 22세의 젊은 장수 사야가로 그는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온 지 일주일 만에 투항합니다. 그가 왜 투항했을까. 혹시 이것이 일본의 계략은 아닐까. 전세에 불리했던 조선은 사야가를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혹시 하는 우려는 말끔히 씻을 만큼 그의 귀순은 조선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군대에 조총 만드는 법과 화약 제조법을 전수하였고 조총병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임진왜란 때에 자신을 떠나온 조국과 전투를 벌이며 조선을 지켰습니다. 이에 그의 공을 인정한 당시 조선의 임금 선조는 그에게 큰 상과 더불어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대구의 우록마을이란 곳에 정착했으며 학문을 공부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김충선은 이렇게 편안하게 있지만 않았습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도 참여하여 공을 세우니 그는 삼란공신으로 불렸고 정헌대부라는 정 2품 벼슬에 올랐습니다. 
그럼 일본은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을까. 당시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동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그는 대륙을 정벌하여 자신의 과업을 달성하여 자손만대에 그 이름이 알려지길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부하들에게 일본을 제패한 사람은 여럿 있었으나 대륙을 제패한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출병에 앞서 조선, 류큐, 필리핀 등에 사신을 보내 복종과 조공을 요구하며 동아시아 정복에 대한 야욕을 보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야망과 더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무역에서 일본이 무역 우위에 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당시 명나라는 일본에 대해 해금정책을 취하고 있던 사이 엄청난 이익을 취하고 있던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으며 이들은 일본에서 은을 사서 중국에서 금과 바꾸고, 중국 비단과 원사를 가져와 일본에 팔면서 막대한 이득을 남겼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은이 고갈상태에 놓였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 일본은 전국적으로 전쟁을 치루는 시기였습니다. 혼란했던 시기이니만큼 생산물이 없었던 일본은 조선에서 면포와 곡물, 도자기를 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주변국들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보고 있던 일본 열도를 통일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도요토미는 주요 상품을 독점할 계획을 세우고 쇼군의 경제력을 높이고, 지방 다이묘들의 무력 근거를 없애기 위해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개별적인 해적해위를 금지합니다. 그리고 이를 명분으로 중국에 정규교역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또 정치적으로 보면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긴 했어도 여전히 독립지향적인 다이묘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그 힘을 어느 정도 약화시켜야 했습니다. 실제로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선 다이묘들 중 상당수는 언제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반기를 들만한 무시못할 세력들이었고 이들의 힘을 해외로 돌려 자신의 과업 달성과 동시에 이들의 힘을 다소 약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마지막 결전이었던 울산성 전투를 담은 그림. 이 전투에 항왜무장으로 참가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가 사야가라는 설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아마 이렇게 일어난 임진왜란에 대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무사도 있었지만 억지로 선봉에 서야 했던 무사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사야가라는 젊은 장수가 있던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의 투항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가 투항을 하고 그 사실을 일본이 알게 되면 고국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그의 투항이 쉽지 않은 결정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의 투항은 더욱 신기한 것은 조선군과 일체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특히 전쟁 초기 파죽지세였던 일본군의 기세를 생각한다면 그의 판단은 섣불렀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따라서 사야가에게 조선으로의 귀순은 전쟁에서 질 것이 두려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야가가 조선의 장군이 되어 조총과 그것을 다루는 군사를 양성하고 전쟁에 참여했던 것을 보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도 두려워하여 투항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고 부산에 붙은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전부터 조선의 문화를 흠모하여  조선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산에 발을 내딛고 나서 그의 생각이 더욱 굳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야가는 자신의 후손들을 어떤 나라에서 살게 해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귀화가 많이 이루어지듯이 예전부터 쭉 귀화는 있어왔습니다. 고려시대에도 흔했던 귀화가 조선시대에도 이루어진 건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사야가는 전쟁을 통해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고 귀순한 독특한 역사의 한 장면을 연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 역사에 활약하고 한 세기하고도 반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김충선이라는 사람이 사야가라는 사실이 <승정원일기>에서 나옵니다. 때는 1761년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조선의 기록이 왜 늦게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는 떠나올 때 부인이 있었으며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하니 그는 가족을 두고 한반도로 전쟁하러 온 장수였습니다. 그런 일본의 선봉장이 조선에 투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가족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이렇게 투항한 일본의 장수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김충선이 사야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야가는 얄팍한 수로 앞을 내다보아 조선의 승리를 예상하고 조선에 붙은 배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김충선은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여 백성이 되길 원했고 명분없는 전쟁으로 자신이 흠모하는 나라를 치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거치며 전쟁에 참여했던 이유는 그가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으로써 자신의 나라에 들어온 침략자임을 몰아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김충선은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사야가는 김충선으로 귀순하였고 그는 사성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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