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에 강항 현창비가 세워진 이유

2022. 10. 21. 20:1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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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

강항은 1567년 전남 영광군에서 불갑면에서 태어난 학자로 호가 수은이었기 때문에 강수은으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22세에 진사가 된 학자로 성혼을 스승으로 모시며 26세에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화평회담이 개최되어 일본군은 경상도 남해안으로 물러가고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식량과 무기를 모아 의병 진영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형조좌랑에 올랐는데  벼슬은 법무부계장에 해당하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리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납니다. 남원에 양원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사 3천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지휘하는 우리 군사 2천명이 있었습니다. 강항은 조정의 명령을 받고 호조 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수송업무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7월에는 원균 휘하의 우리 수군이 거제도의 칠천량에서 전멸하자 일본군은 해상으로 대병력을 수송하여 전라도를 침공합니다. 하지만 양원이 도망치고 이복남은 전사하여 남원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영광읍으로 달려와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오합지졸에 불과한 의병은 흩어졌습니다. 영광마저 함락되자 가족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합류할 목적으로 무안에서 승선합니다. 하지만 사공의 농간으로 부친이 탄 배와 서로 헤어지게 되고 믿었던 하인이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는 피난 가는 길보다 부친을 찾는 일이 급했습니다. 바다를 헤매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처음 배를 탄 포구로 왔습니다. 하지만 오즈의 번주 등당고호(籐堂高虎)의 수군에 의해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배에 탄 사람들은 자결할 생각으로 강항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에 뛰어들었으나 뭍이 얕아죽지 못하고 일부는 뭍으로 도망치고 나머지는 적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이 시기에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오즈로 잡혀온 동포 남녀 1천여명이 아침 저녁 길거리에서 무리가 되어 울고 있다.” -강항의 간양록-
“온 집안이 참몰당한 뒤부터 눈에 말라 붙었건만 옷 소매가 다 젖었다.”
포로생활 중에 적들과 어울리고 일본인들과 어울리며 돌아가지 않으려는 조선인들을 보며 그래서 못쓴다며 타이르며 돌아다니는 게 강항의 일과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인 참모쯤 되는 이엽이란 사람이 일본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일본장수들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받은 물건을 동포들에게 나눠주고는 자기 몫을 남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배를 한 척 구해놓고는 귀국할 계획을 새우고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엽은 결국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고 그 때 남긴 시 한 수를 강항이 전해듣고는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봅이 오건만 한은 가이 없고
고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 설렌다.
자식 잃은 부모는 새벽달에 한숨 짓고
아내는 버린 인생 아침해에 통곡하네 
대를 이은 옛동산에 꽃이 지고 
선영은 풀도 황폐했으리
삼한은 모두 점잖은 집안이거늘
어찌 이역에서 우양(牛羊)과 섞일 건가”
이 사건은 당시 일본에 잡혀와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강항은 이후 한문으로 필담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한의사인 의안(意案)과 이안(理安) 그리고 순수좌 즉, 후지와라 세이까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후지와라 세이까는 일본의 난세 시절 그의 아버지와 형들이 참살당하는 위기 속에서도 중이 되어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30세에는 수좌(首座)라는 자리에 오른 인물로 임진왜란에는 반대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중의 신분이었지만 불교를 버리고 유학을 배울 생각이었고 이런 시기에 강항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순수좌의 나이는 38세, 강항의 나이는 32세였습니다. 당시 일본 최고의 사상가인 후지와라는 강항으로부터 우리나라 과거시험 절차 등 의례를 배워 일본에서 시행토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당시 교육이 종교로부터 분리되던 시점이라 강항의 유학사상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후지와라는 강항의 협조를 받아 『사서오경』, 『곡례전경』, 『근사통록』, 『근사별록』, 『소학』을 필사했는데 이 책들에는 강항의 서명이 있다고 합니다. 
 강항은 비교적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하나 아무리 그래도 포로 신분, 그는 ‘너 일본 군신, 조선침입은 천인과 함께 용서할 수 없는 폭거’라고 풍신수길의 침략을 고발하는 글을 성문에 붙이고는 오즈를 탈출했으나 다시 붙잡히게 됩니다. 순수좌는 낙서의 글씨가 강항의 것임을 알아보고 진심어린 충고도 했습니다. 한편 강항은 의사인 요시다가 저술한 『역대명의약전』에 서문을 써주고 그를 통해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강항은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하였고 지식인들에게 귀국을 주선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후지와라와 당시 해운왕으로 불리던 요시다의 호의로 그는 가족 10명을 포함한 다른 포로 28명과 함께 1600년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강항은 고향에서 책을 쓰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적지에 끌려간 것을 두고 모함하는 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전좌랑 강항은 정유년에 적에게 끌려갔다 돌아온 후 재주가 있건만 버림을 받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외다. …… (연전에 일본에 다녀온 사신 여우길(呂祐吉) 일행의 이야기를 들으면) 일본 사람들은 강항의 절개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음이 편협해서 끼리끼리 친하고 절개를 포상하고 높일 줄 모르니 가통한 일입니다.”

하야시 라잔

이후 순수좌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강항에게서 배운 주자학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임나산(林羅山) 즉 하야신 라잔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일본의 중요문서를 다루고 문교정책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1630년에는 공자의 사당과 함께 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이 동경대학의 전신인 창평교(昌平校)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르친 것은 강항에서 이어져온 주자학이었고 이는 일본사람들이 자랑하는 무사도 정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난세에는 일본 무사들 사이에는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하여 도덕적 기준이 없었는데 이 시기 이후에 주자학의 충의 사상을 이론화한 것이 무사도가 되었습니다.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땅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천지의 예를 나타냅니다. 실상 인간은 이 천지의 예를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세계는 모든 것이 상하관계 또는 전후관계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인정하고 세계를 예의 마음으로 꼭 채운다면 군신관계가 어지럽히지 않고 그에 따라 마땅히 인간 사회 또한 평화롭게 될 것입니다.” -하야산 라잔, <삼덕초>-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하야시 라잔의 주장은 에도막부의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이것은 강항의 사상이 후지와라 그리고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에게 전해진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즈에는 강항 현창비가 세워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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