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다스리는 법률근간 경국대전
2022. 10. 18. 20:3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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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집현전의 직제학이던 양성지가 당시 조선의 왕이던 세조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그는 통일된 법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법전이 없었느냐, 고려시대에는 법률이 있었지만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고려공사는 3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고려공적인 일은 3일이면 바뀐다는 말로 안정적이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 때에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관습법에 법률적 효력을 지닌 왕명을 합해 정리한 것으로 <조선경국전>을 펴냈고 3년 뒤에 <경제육전>, 태종 때 <원육전>과 <속육전> 그리고 세종 때에는 <신찬경제육전>이 편찬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이 바뀔 때마다 법전이 새로이 등장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법률을 적용해야 하는 관리들은 그 때마다 난처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법전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고 따라서 우리의 실정에 맞고 오랫동안 쓰일 수 있는 통일된 법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조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법전을 편찬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왕위 교체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던 데다가 여전히 그 여파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세조는 이를 교통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곧장 실행에 옮기지 않고 1460년이 되어서 경국대전의 집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설치된 것이 유전상정소였으며 이곳에서 서거정, 양성지, 최항, 김국광, 한계희, 노사신, 강희맹, 임원준, 홍응, 성임 등으로 구성되어 그동안 법전을 분석하고 이제껏 내려온 관습법과 관례법을 토대로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형법인 <대명률>도 때때로 참고하며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완성된 것이 <호전>이었고 이듬 해에 <형전>이 완성되었으며 1466년에 <경국대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법전은 조선의 기본적인 법전으로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곧바로 시행되지는 않고 계속 손질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세조가 세상을 뜨고 예종 때를 지나 성종 때에 이르러 반포되었습니다. 조선을 다스릴 법전을 만들겠다고 명을 내린 지 28년 만에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경국대전>은 국가행정조직에 관해 적어놓은 「이전」, 세금, 녹봉, 노비매매에 대해 적어놓은 「호전」, 과거, 외교, 제례, 혼인에 대해 적어놓은 「예전」, 국방과 군사에 관한 「병전」, 형벌과 재판에 대해 다룬 「형전」 그리고 도로와 교통, 건축, 도량형에 대해 적어놓은 「공전」으로 구성되어 육전체제로 완성되었습니다.
<경국대전>의 편찬의 의미는 컸습니다. <경국대전>을 통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합리적으로 법의 집행과 적용이 가능해졌습니다. 물론 <경국대전> 이후에도 영조 대에 <속대전>, 정조 대에 <대전통편>, 고종대에 <대전회통> 등 법전편찬이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가 변화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법의 수정과 추가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경국대전>의 틀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경국대전’부터 실렸던 조문은 ‘원(原)’으로, ‘속육전’에서 보충된 내용은 ‘속(續)’으로, ‘대전통편’의 보충 내용은 ‘증(增)’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전회통’에 첨가된 내용은 ‘보(補)’로 표시한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경국대전의 (이전)에서는 관리들의 출근시간을 묘시(새벽5시~7시), 퇴근시간을 유시(녁 5시~7시)로 정하고. 65세 이상은 지방의 관리로 부임할 수 없었고 중앙정부에서만 일하도로 하였습니다. 후궁들과 궁궐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품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빈(정1품),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 등을 기록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유교국가를 표방하는 조선에서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호전)에서는 3년마다 한 번식 호적을 고쳐 인구수를 조사하였고 토지는 6등급으로 나누어 20년마다 면적과 소유지를 명시하였습니다. 토지매매와 가축 매매도 (호전)에서 정하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세금을 거둘 때 기초자료로 사용한 것입니다. 다만 새로 개간한 땅이나 전부 혹은 절반 이상 재해를 입은 땅, 병이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하고 놔둔 땅에서는 농부가 권농관에게 신고하고 권농관은 이를 조사하여 8월 15일 전에 고을 사또에게 신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이들에 대한 조세를 면제하기 위함입니다.
(예전)에 따르면 사람이 많고 적음에 따라 지역별로 과거합격자수를 정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지역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인재할당제였습니다. 대과의 경우 1차 합격자 정원 240명은 성균관(50명), 한성부(40명), 경기도(20명), 충청도(25명), 전라도(25명), 경상도(30명), 강원도(15명), 평안도(15명), 황해도(10명), 함경도(10명)로 정한 것입니다. 대과의 2차 시험은 33명을 설발하고 3차 시험으로 등수를 정합니다. <예전>에서는 매년 여름철 마지막 달에 각관청과 임금의 친척, 정3품 이상의 관리, 맡은 일은 없어도 정 3품 이상의 양반 중 일흔 살이 넘는 노인, 그리고 활인서의 환자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 얼음을 나누어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서는 양반의 딸 중 서른 살이 가깝도록 생활이 곤란하여 시집가지 못하는 사람은 예조에서 임금에게 보고하여 적당한 혼인비용을 보내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지 않은데도 서른 살이 너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엄중히 벌하고 있는데요. 당시 유교사회에서는 관혼상제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법으로 결혼을 장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병전>에서는 16세부터 60세까지 남자에게 군역을 규정하였고 여기에는 60세 이상의 사람과 불치병 혹은 불구가 된 사람은 제외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치병에 걸린 부모를 두거나 일흔 살 이상의 부모를 둔 아들 중 한 명은 무조건 면제되었으며 아흔 살 이상의 부모를 둔 아들들은 전부 면제가 되고 아들이 없으면 손자가 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봉수라는 통신체계가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하나의 불을 피우고 적이 나타나면 둘, 접근하면 셋, 침범하면 넷,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의 불을 올렸고 이것도 병전에 기록되었습니다.
<형전>에 관련된 내용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것은 바로 산후휴가였습니다. 공노비 중 여자노비에게는 아기를 낳기 전 30일, 낳고 나서는 50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그 여자 노비의 남편에게는 출산 후 15일의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비들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랐으며 아버지가 양인이더라도 어머니가 천인이면 천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형전>에서는 부정을 저지르는 관리들을 단속하는 법률도 있습니다. 분경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말하며 달리 말하며 벼슬자리를 부탁하거나 죄 지은 것을 봐달라며 그 집에 드나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형전>에서는 권세 있는 집에 드나드는 자는 장형 100대와 300리 밖 유배에 처하도록 하고 있으며 권세 있는 집안이란 이조, 및 병조의 관리, 각 부대의 높은 장수들, 관리들을 감시하고 고발하는 사헌부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때에 같은 성씨의 팔촌이나 다른 성씨의 육촌은 예외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를 거두어들일 때 수를 쓰는 사람이 있으면 신고할 수 있도록 했으며 조사와 심문을 통해 죄가 밝혀지면 죄의 경중에 따라 시골 역참의 아전으로 삼거나 다른 도의 시골구석의 역참으로 평상 일하게 하였습니다. 역참은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 말을 빌려 타는 곳으로 이곳에서 말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해당하는 삼심제가 조선에서는 삼복제라 불리며 <형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육전>에서는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를 다르게 정하고 있으며 나룻배는 5년이 되면 수리하고 10년이 되면 새로 제작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배를 타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한 법률이었습니다.
경국대전은 신분제를 전제로 했다는 점과 서얼의 과거 응시 재한, 그리고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는 등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국대전)의 편찬은 조선이 이전 시대인 고려에 비해 진일보한 법치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여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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