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에 얽힌 이야기

2022. 10. 16. 20:3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 기문
정묘년, 음력 4월 20일 깊은 잠에 꿈을 꾸었다. 
꿈에서 박팽년, 최항, 신숙주와 함께 산 아래 이르니, 
우둑 솟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있고, 
복숭아나무 수십그루가 있다. 
오솔길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는데 
산관  야복 차림의 사람을 만났다. 
그가 공손하게 일러준 대로 
기암절벽과 구불구불한 냇가 길을 따라갔다. 
어렵사리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마을이 나타났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또한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고
개울가에는 오직 조각배한 척이 흔들거렸다.
한 눈에 도원동임을 알아차렸다.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 언덕을 오르거니 내려가거니
두루 즐거워하던 중, 
홀연 꿈에서 깨어났다.

 안평대군은 시서화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꾸었던 꿈을 직접 그리지 않았는데요. 그 이유는 안평대군은 왕족으로서 꿈과 관련된 그림이나 글을 제작하는 것은 위험함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지몽이라고 하여서 현실과 꿈을 연결지어 생각합니다.. 그것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하여 안평대군은 자신이 그리지 않고 자신과 친하게 지낸 화가를 불러 자신이 꾼 꿈을 화폭에 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안견을 불러 그리게 한 것은 꿈 속에서 도원을 거닐다라는 의미를 지닌 ‘몽유도원도’였습니다. 안견이 그린 그림으로 전해오는 작품이 몇 개 있으나 확실히 안견의 작품으로 공인된 작품은 바로 몽유도원도입니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경을 표현한 몽유도원도는 매우 가는 선을 무수히 겹쳐서 바위와, 돌, 산봉우리 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상상을 초월한 수준으로 섬세한 선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섬세한 대작을 단 3일 만에 완성하였습니다. 두루마리로 제작된 이 그림과 함께 이 그림을 예찬하는 시들이 함께 있으며 무려 20미터에 이릅니다. 
이 그림은 어떻게 읽을까요. 옛날에는 서적을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몽유도원도는 현대의 책처럼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읽어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제작된 이유는 현실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된다고 생각하지만 꿈은 흔히들 반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하여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는 반대로 읽어야 하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이라 합니다. 반면 사람은 표현하지 않았는데 아마 사람이 하단에 있었는데 잘려진 것이라고 추측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릉도원이라 하면 권력, 권위, 돈, 다툼이 전혀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이 부적거리는 현실세계는 세속에 수많은 다툼이 존재하기에 안평대군은 꿈꾼 장면을 묘사한 몽유도원도에서는 사람 표현이 안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다만 오른쪽에는 초가집과 빈 배 즉 사람이 없는 이 그림에 사람의 흔적을 그려놓았습니다. 이곳은 누군가 왔다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그 누군가는 이 곳에 왔다가 어디로 갔을까요. 바로 현실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상향에 왔다가 세속에 물들어 다시 돌아간 것을 표현한 것으로 사람이 왔다갔지만 비어있는 곳 이 곳이 바로 안평대군이 꿈꾸는 곳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이 그림은 구도가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눈높이에서 평평하게 바라본 시점, 그리고 가운데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시점, 그리고 가장 오른쪽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시점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화폭이 옮겨질수록, 달리 이야기하면 현실세계에서 이상향으로 들어갈수록 짙고 어두웠던 모습이 화려하게 표현되었는데 복사꽃들의 세계를 붉은 색과 다홍색, 그리고 금가루를 표현하여 도달하기 힘든 이상향에 대해 신비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몽유도원도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21편에 달하는 서예작품이 붙어 있는 대작입니다. 이 몽유도원도가 완성되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이 그림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김종서, 신숙주, 서거정 등 당대 최고 문인들이 친필로 남긴 몽유도원도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무계정사

그러던 어느 날 안평대군은 꿈에서 본 풍경과 비슷한 곳을 현실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 곳을 인왕산 기슭에서 발견한 것인데, 이 곳에 무계정사를 짓고 당대의 문인학자들을 초대해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이 그려지고 난 6년 뒤, 계유정난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안평대군을 처형하자는 의견이 줄을 이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올라온 것이 바로 안평대군이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왕산이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라 하여 왕권탈취의도로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몽유도원도에 예찬문을 올린 사람들 중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수양대군 측에 붙은 신숙주, 최항, 서거정, 정인지, 김수온 등은 살아남게 되고 김종서, 이현로, 박팽년, 성삼문, 이개 등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꾼 꿈 내용에서 사육신 박팽년은 험한 바위길을 안평대군과 동행했고 신숙주는 뒤늦게 끼어들어 도원을 누려 이 그림이 혹시 살생부가 아니었느냐는 해석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당시 몽유도원도에 글을 올린 21명의 문인명단 중에 6명 정도만이 희생되어서 이것을 살생부로 보기는 힘들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평대군이 왕족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등장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 그림을 그린 안견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성종시기까지 생을 이어나갔으며 화원은 정6품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그는 정4품까지 오르는 파격적인 출세를 하였습니다. 한편 안견은 안평대군이 아끼던 먹을 훔치다가 걸려 쫓겨났다고 합니다. 안평대군 입장에서는 안견이 일부러 훔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살리기 위해 화를 내며 그를 쫓아냈다는 해석이 달렸지만 안견이 자신을 후원해준 안평대군의 소중한 먹을 훔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따라서 안평대군은 안견을 살리기 위해 먹을 훔쳤다는 이야기를 조작하여 안견을 살렸다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몽유도원도는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의 덴리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해방 후 이 몽유도원도를 사들일 기회가 있었지만 돈이 없어 못 사들였습니다. 그렇게 일본으로 다시 흘러들어간 몽유도원도, 어떤 경위로 일본으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한론의 근거지가 된 이전의 사스마번, 지금의 큐슈에서 몽유도원도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소중한 문화재가 일반적이지 않은 경로로 흘러갔다고 생각되나 구체적인 정황이 없으므로 약탈문화재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화재가 언제쯤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을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