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과학 문명의 결정체 칠정산
2022. 10. 15. 20:3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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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은 천체의 운행 즉 태양, 달, 별의 움직임을 연구하여 만듭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시간을 정확히 알아야 했는데 이러한 것을 역법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일단 천체의 움직임을 알려면 관측기구가 있어야 하고 이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제도와 지식 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계산하여 달력을 만들었을까. 조선 세종 이전의 시기에는 우리만의 역법이 없었습니다. 대신 중국의 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것을 따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매년 동지 때 달력을 받으러 중국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달력을 가져와 사용하였는데 때문에 동지 때 가는 사신을 ‘동지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지사가 중국에 가면 중국의 황제는 황력 10권과 민력 100권을 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천자의 나라라고 생각한 중국이 주변국가에 행하는 의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사용하는 역법을 조선에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위도와 경도의 차이가 있었고 그리하여 중국의 역법을 사용하여 그대로 우리나라에 사용하는 것은 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종대왕은 우리나라만의 역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순지, 김담 등에게 제작을 명령합니다. 세종대왕은 우리만의 역법이 있어야 백성들이 정확한 계절과 절기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지는 게 월식인데, 사각형이면 그림자가 직각이어야 한다. 그림자로 볼 때 지구는 둥글다.’
이순지는 위와 같이 생각한 사람입니다. 일식과 월식의 계산을 통해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것은 세계에서 그가 최초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종은 이순지가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그가 산학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이순지를 불렀습니다. 세종은 궁금하여 조선의 북극고도를 물었더니 이순지는 38도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명나라 산학자가 다녀갔는데 그를 통하여 조선의 고도가 38도라는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종은 이순지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을 반성하였습니다. 이후 이순지를 신임하게 된 세종은 그를 기상관측을 하는 관청인 서운관으로 배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달력의 제작을 명한 것입니다.
이에 이순지는 천문학은 중인들이 하는 학문이라 인재를 모으는 것을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세종대왕은 영의정 정인지를 천문관장에 임명하고 인재를 모으기 시작했고 김담과 이순지 등이 참여하여 칠정산이라는 역법서를 만들게 합니다. 칠정산은 일곱 천체의 운행과 하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알고 그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7정을 계산한 책이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역법서가 왜 계산서라는 의미를 달게 되었을까. 아마 이 부분에서는 중국을 의식해서 이렇게 제목을 지었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중국을 사대하는 국제질서가 동아시아에 자리했는데 조선이 자신들만의 역법서를 가지고 있으면 중국에 심기를 거스릴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내편과 외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편은 1444년에 만든 조선의 달력이자 칠정에 관한 연구서로 원나라의 수시력과 명나라의 대통력을 한양의 위도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고 외편은 아라비아의 역법인 회회력을 기본으로 삼아 만든 것이었습니다. 외편과 내편은 각도의 표시법이 기본적으로 다릅니다. 내편은 중국고대의 전통을 따라서 원주를 365.25도, 1도를 100분, 1분은 100초로 하였고 외편은 그리스의 전통에 따라 원주를 365도, 1도를 60분, 1분은 60초로 하였습니다.
중국 명나라 이전의 왕조 원나라에서 사용한 수시력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역법 중 가장 훌륭한 것이었는데 이를 토대로 만든 칠정산 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에 대한 해설을 담으면서 칠정에 해당하는 목화토금수와 일월에 대한 자료를 담았습니다. 하지만 칠정산으로는 일식이나 월식을 정확하게 관측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 이순지는 김담과 함께 아라비아의 달력인 회회력을 연구하여 우리나라에 맞게 해가 뜨고 지는 시간, 일식, 월식과 같은 천문시간을 계산한 책을 마드니 그것이 바로 칠정산 외편이었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난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서운관이 발표한 시간에 태양이 사라지기 시작했는데요. 그리고 이 일식시간에 맞춰 세종은 해를 부르는 의식을 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중국과 아라비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일식을 예측한 나라가 되었고 세종의 권위는 더 높일 수 있었습니다. 왕의 권위를 높인 조선의 달력의 탄생은 우리나라에 맞는 계절과 절기를 알려주었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여 농업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칠정산이 만들어진 시기가 바로 조선 세종 시기잖아요. 이 때의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과학업적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 중 빛나는 것이 바로 칠정산 내편과 외편입니다. 그리고 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와 같은 정밀한 천문관측 기구들을 직접 제작했으며, 이 기구로 한양의 경위도와 동 하지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였습니다. 이렇듯 그 나라의 실정에 맞는 역법을 만드는 것을 기구 제작과 관측 그리고 계산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의 과학지식이 총 동원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것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리더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군주 아래 그를 도와준 조선의 천재들이 모여 만든 것이 바로 칠정산 내·외편입니다. 또한 수학책에 가까운 이 책에 적힌 수치들이 현대 천문학 방법으로 얻어낸 것과 거의 동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600여 년 전에 이렇게 정확한 수치를 구한 것은 여전히 미스테리인데요. 분명한 것은 그간의 축적해온 우리 선조들의 과학·지식 위에 중국과 아라비아의 과학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과학문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입니다.
이후 1683년 일본에서는 정향력이라는 역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조선의 칠정산에 비해 약 200여 년 늦은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일본 최초의 천문계산법이라고 하여 엄청난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향력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삽천춘해(澁川春海)이란 사람으로 조선학자의 도움을 언급했습니다. 그의 스승이 강야정현정(岡野井玄貞)이었는데 이 사람이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왔던 박안기로부터 칠정산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이 삽천춘해로 전해졌고 현재 그에 대한 평가는 대단한 천문학자로 숭앙받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보다 시기가 앞선 칠정산의 편찬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위대한 업적인지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성종 이후 하락세를 탄 조선천문학은 임진왜란이후로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로 인해 청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던 시헌력을 조선에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당시 국제정세에 따른 사회변화였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칠정산을 우리 책력으로 만들어 나라에 배포하였는데 1598년에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이를 트집잡을까봐 조정에서는 우리 책력 앞·뒷장을 명의 대통력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인조 때에는 김육이 청의 시헌력 사용을 건의하여 병행하여 사용되다가 1706년에는 시헌력으로 책력을 만들고 칠정산 사용을 중단했다고 하니 그 시기가 바로 숙종 때의 기록입니다. 칠정산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들어갔지만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만원 속에 그려져 조선 초기 과학 강국으로서의 모습을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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