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백자에 대하여

2022. 10. 17. 20:3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조선 백자

선사시대에는 음식을 저장하기 위해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먼저 등장한 실용적 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들어 1000℃이상의 온도를 만들어내는 터널식 가마가 생겼고 이로서 도기의 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지나면서 자연스레 가마의 온도가 올라가고 남북국 시대에 들어서는 중국에서 유약을 발라 다시 굽는 기술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도자기의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이러한 도자기기술은 고려시대에 들어 기술적으로 더욱 진보하게 되어 12세기에는 고려만의 독자적인 기술, 상감청자로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몽골의 침입으로 침체에 빠졌습니다. 이후 들어선 조선대에 이르러서는 초기 분청사기와 백자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의 청자와 조선시대의 백자는 그 시대가 추구하는 이념과 멋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청자가 귀족의 사치와 화려함을 대표하는 물건이었다면 조선의 백자 역시 당시 지배층인 양반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양반은 고려의 귀족과는 달리 검소하고 건실한 삶을 추구한 성리학적 질서에 따라 백자를 더 선호하였습니다. 고려가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화려한 불교미술이 꽃을 피웠고 이것은 도자기에도 투영된 반면 성리학을 지배이념을 받아들인 조선사회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도자기 장인들로부터 실용적인 자기의 생산을 요구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고려청자가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로 대체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게다가 백자는 견고하고 실용적이며 깨끗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선비들은 이것들을 더욱 선호한 것입니다. 

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

  한편 조선이 백자를 주로 생산하게 된 것은 당대 대외관계에 기인한 것도 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나라와 관계를 맺으며 금이나 은을 조공품으로 바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금이나 은을 재료로 하는 그릇은 조선에서 금지하게 되었고 그렇다고 유기그릇을 만들자니 원료인 구리를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백자의 출현은 사회적 필요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그래도 조선 초기에 백자 가마터에서 청자 파편들과 그릇 안에는 청자유약을 바르고 그릇 표면에는 백자의 유약을 바른 파편도 나와 조선시대 초기에도 한 동안 청자의 생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백자시대의 앞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분청사기가 있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등장하여 15에서 16세기까지 제작된 도자기입니다.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胎土) 위에 정선된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에 유약(釉藥)을 씌워 환원염(還元焰)에서 구운 도자기입니다. 회백색의 이러한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변모한 도자기지만 청자는 귀족의 주요 수요계층이었던 반면 분청사기는 서민들도 쉽게 이용하는 도자기였습니다. 그만큼 실용적인 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자의 종류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진사백자, 잡유 등으로 구분됩니다. 순백의 백자에 코발트 안료로 푸른 그림을 그리는 청화백자는 중국의 원나라 때 시작하여 명나라 선종시기에 최전성기를 이룬 도자기제조술로 명에서 이 기술을 배워 세종대왕 말기에 청화백자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조 때에는 어느 정도 자체 생산이 가능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청화백자에 쓰이는 코발트안료는 그 당시 페르시아 지방에서 아랍상인이 중국에 판 것을 다시 수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청 혹은 회회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세종시기에서 세조 시기에 생산된 청화백자들을 보면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흡사한 것들이 많아 구분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유약 씌우는 방법 뿐만 아니라 공예의 장식까지 그대로 답습하여 표면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이후 세조 말에서 성종 시기에는 청화의 무늬에서는 우리나라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매화와 새,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꽃과 산수무늬 등이 표현하면서 시원한 여백을 남겼으며 이 외에도 당초절지문, 칠보문, 연판문, 여의두문 등의 부수적인 무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난초를 그리는 초화문이 나타났으며 이 무늬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커지는 쪽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후기에는 물고기 무늬, 용무늬 등이 그려졌으며 파도문, 장생문 등 한국적인 미가 더욱 추가되었습니다. 하얀 바탕에 푸른 그림을 그려놓은 청화백자는 조선에 들어와서 독창적인 모습으로 발전해간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백자는 소박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당시 양반들은 물론 조선왕실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는 왕실의 의례에서 쓰일 백자를 제작하기 위해 지금의 광주 사옹원의 분원을 만들었습니다. 대략 1400년대 중반에 설치된 사옹원의 분원에서는 왕실에 필요한 자기와 국가 행사에 필요한 그릇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 소유하거나 매매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도자기 제조장이 만들어진 이유는 도자기를 만들 때 필요한 백토를 많이 생산하는 장소였고 가마 작업에 필요한 땔나무의 공급이 쉬웠습니다. 그리고 수도의 한양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한강을 끼고 있어 비교적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조정에서는 질그릇이나 사기그릇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는 번조관을 파견하여 관리감독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도자기제조장을 만들고 관리했던 것은 의례를 중시한 조선왕조의 성격상 어느 정도 격식과 품질을 갖춘 도자기가 필요했고 이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백자 철화끈무늬병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묘호란등을 겪으며 17세기에 조선은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는 조선의 도자기제작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후금과 명나라가 대치된 상황에서 청화백자의 원료를 수입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왕실 의례에 필요한 자기의 생산마저 제약을 받은 것입니다. 이전보다 도자기 제작여건이 어려워졌으나 제작 안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소박한 모습의 자기가 등장했으니 바로 철화백자의 탄생입니다. 철화백자는 철 성분의 철화문 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입니다. 이러한 철화백자의 무늬는 숙련된 솜씨에 빠른 시간에 그려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철화백자의 무늬는 역동적이면서 대범함이 드러나는 동시에 추상적인 모습과 대상을 간략하게 표현해낸 모습, 그리고 익살과 해학도 담았습니다. 특히 이러한 철화백자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백자끈무늬병입니다. 도자기의 목 부분에 한가닥 끈을 휘감아 놓은 것이 마치 현대인이 넥타이를 맨 것과 닮아 있습니다. 거침없는 선과 여백의 적절한 조화는 몇 백년 전의 도자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감각이 느껴지는 도자기입니다. 이 도자기의 아래에는 니나히라는 한글이 쓰여 있는데요. 장인의 사인인지 뜻을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 만들어진 자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의 도자기기술이 일본으로 넘어간 사건이 있으니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때는 1598년 니베시마군이 산 속에서 길을 헤메다가 한 조선인의 길 안내를 부탁하게 됩니다. 그 청년은 나베시마군에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철수할 때 그 조선청년을 데리고 갑니다. 왜냐하면 그가 조선에 남게 될 경우 그가 조선왕실로부터 받은 피해를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으로 가서 도자기굽는 일을 명령받았으니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이삼평으로 바로 일본 도자기의 원조이자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측의 기록을 믿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마 그는 일본측의 기록과는 달리 무장한 일본군에게 어쩔 수 없이 길안내를 도왔고 일본으로 끌려가 도자기를 만든 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삼평의 도자기를 바탕으로 일본은 많은 도자기를 만들어내 유럽으로 수출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준높은 조선의 백자가 이웃나라에게는 약탈의 표적이 되어 전쟁까지 일으켰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