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금강내산전도
2022. 10. 24. 20:2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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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라틴어: pax)와 ‘기도하고 일하라’(라틴어: ora et labora)를 모토로 내세운 성베네딕도회가 1920년대 초 조선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당시 이 곳의 설립자는 노르베르트 베버였습니다. 1911년 조선에 처음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는 조선의 사회와 풍습을 체험하며 배워갔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 책에 노르베르트 베버는 수많은 사진과 기록을 이 책에 담았는데 당시 조선은 일본에게 강탈당했기 때문에 언제 이들의 풍습과 문화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록해두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노르베르트가 조선에 왔을 당시에는 아시아보다 유럽의 문화가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노르베르트는 그런 오만한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보지 않았고 애착과 진정어린 관심으로 조선의 문화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노르베르트는 1930년에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노르베르트가 보았던 조선의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노르베르트의 조선에 대한 애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학교를 세워 조선인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지만 언젠가는 독립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으며 자신이 세운 학교의 제자들이 조선이란 나라가 독립했을 때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교인이지만 선교와 더불어 조선의 미래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인 노르베르트 베버는 금강산에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들리기 훨씬 전에 이 곳에 와 그림으로 남긴 조선 후기의 화가가 있었으니 그는 겸재정선이었습니다.
겸재 정선은 겸재 정선은 사대부양반입니다. 조선시대에 화가는 노비 혹은 중인이 해야 하는 일로 여겨졌지만 겸재 정선은 그림에 뛰어났던 사대부였습니다. 그리고 유학을 겸비한 그의 생각은 그림에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4살에 그림의 길에 들어서 자신의 화풍을 개발하는 공을 들였습니다. 중국의 화풍에 벗어난 우리 산하를 자신만의 창법으로 그려내기에 이르는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고 특히 산수화에 있어서는 당대 제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진경산수화란 무엇일까요. 이전의 그림들은 중국의 화풍을 따라 산수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던 조선후기 당시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하자 조선은 더 이상 중국왕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 것을 표현하는 문화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것에 관심을 갖고 우리의 경치를 그리니 실경산수가 유행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 발전한 것이 진경산수화로 경치를 보고 거기에서 얻은 감흥을 더해 작품으로 표현합니다. 상상을 해서 그리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당시의 사회변화상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 하지만 성리학의 한계를 학자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자각은 미술계에서도 보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회화는 이제 중국의 그것에서 벗어나 조선의 미를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그리하여 태어난 회화의 형태가 바로 진경산수화입니다.
특히 삼원법이 적용된 인왕제색도는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인왕제색도는 큰 비가 내린 뒤 맑게 개인 인왕산을 그림 산수화로 이 그림은 그의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친한 친구 이병연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회복을 바라는 마음으로긴 장마가 끝난 후에 맑게 갠 인왕산의 모습은 담은 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왕제색도는 위층은 인왕산을 산 아래서 위를 바라보는 고원법으로, 그리고 소나무가 있는 중간에는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평원법으로, 그리고 가장 아래층은 집을 내려다보는 심원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원근법은 르네상스에 발명된 선원근법으로 나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고 나와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멀리 있는 것은 작게 표현하는 것으로 인왕제색도는 이러한 서양의 그림과는 다른 초점을 가지고 그렸습니다. 인왕제색도에 등장하는 인왕산은 서울에 실재하는 산입니다. 그런데 인왕제색도의 인왕산은 검게 표현되었습니다. 인왕산은 본래 숯검뎅이산이 아닙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이기 때문에 나무가 우거진 곳을 제외한 곳은 바위가 들어나 밝은 색으로 나타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겸재 정선은 흰 바위를 검게 표현합니다. 그것은 인왕산이 가지는 강렬한 모습을 표현해 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긴 장마에도 버텨낸 인왕산의 강렬함처럼 친구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거기에 구름은 밝게 표현하여 조화를 이끌어냅니다. 장마가 지나고 난 뒤 인왕산의 느낌을 표현한 이 안개들이 산을 타고 내려가듯 그려 산 밑에 있을 집들을 가려주어 자칫 그로 인해 복잡할 뻔한 그림 구도를 명쾌하게 해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림 아래에 작은 지붕이 보입니다. 이곳이 정선의 친구 이병연의 집이며 크게 보이는 집은 두 사람의 스승인 김창흡의 집입니다. 아마 보이지 않은 안개 아래에는 정선의 집도 있을 것입니다. 정선과 친구 이병연이 함께 했던 공간으로 그려진 인왕제색도는 친구가 병에서 낫기 바라는 칠순 노인의 간절함 염원이 담긴 명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친구 이병연이 죽기 전인지 후인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그림의 운무는 친구를 보낸 정선의 슬픔을 표현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이라는 풍경만 담은 것이 아니라 인왕산이 담고 있는 정신과 작가의 바람을 담은 것으로 인왕제색도는 조선회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심혈을 그린 것은 금강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금강산을 조선에 선교사로 온 베르베르트 베버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러던 그는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전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에 절벽과 봉우리에 감춰져 보이지 않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절과 봉우리들을 표현한 그림으로 베르베르트 베버는 큰 감명을 받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겸재의 화첩은 독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90년대 겸재 정선의 화첩이 서구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고미술가들의 표적이 된 정선의 화첩 때문에 이 화첩을 보관중이던 상트오틸리엔 수도원도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수집가가 수도원까지 찾아와서 경매에 부치고 싶다며 50억 원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수도원 측에서는 정선의 화첩을 아무 대가도 없이 대한민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이 이 그림들이 독일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돌려주는 것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도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80여 년만의 귀환인 셈입니다.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한 대학교에서 보관되면서 국내에 반환되기는커녕, 한국취재진에게 보여주는 것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은 원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면서도 다른 나라의 돈도 거절하고 이 겸재의 화첩을 원래의 고국으로 돌려주기로 결정합니다. 겸재 정선의 화첩이 독일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보면 일본에 머물러 있는 몽유도원도를 찾아오지 못하는 상황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어쩌면 겸재의 화첩 21점을 노르베르트 베버가 소장했고 독일로 가져갔기 때문에 오히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에 침탈되지 않았던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훗날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것은 아니지만 미술품을 통한 대한민국과 독일의 우정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한 장면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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