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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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백제 동성왕
백제 삼근왕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러면 후계자 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요. 삼근왕의 연령을 볼 때 그에게는 아들이 없거나 있다고 하여도 지극히 어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에 오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24대 동성왕입니다. 따라서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다섯 아들 중 사마와 모대가 그 후보가 되었고 모대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바로 동성왕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 중국 역사서와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여대(餘大)'로 나옵니다. 동성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남제서』에는 동성왕의 조부의 작호를 받은 것으로 이해했으며 『남제서』를 인용한 『..
2023.11.14 -
문주왕의 웅진천도와 해구의 국정농단
문주왕은 백제의 제22대 군주로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의 아들,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에는 문주왕에 대해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가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오고 있고 개로왕 대에 상좌평에 있던 사람은 문주였습니다. 상좌평은 왕의 동생이나 왕의 장인이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주왕은 개로왕이 피살당할 즈음 신라에 파견되어 1만 명의 군사지원을 얻어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문주왕은 왕위에 올랐습니다. 한성이 함락되어 많은 왕족들이 제거되었고 그나마 남은 직계가 문주왕이었습니다. 개로왕의 또다른 동생 곤지가 있었으나 그는 왜국에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목협만치나 조미걸취가 ..
2023.11.11 -
동성왕 피습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서기 501년, 동성왕이 백가에 의해 피습됩니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이 해구에게 시해되고 삼근왕도 즉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귀환한 이가 바로 동성왕입니다. 고구려의 압박과 더불어 앞선 왕들이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던 지라 동성왕의 불안감은 더했을 것입니다. 개로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 즉 직계가 아닌 방계 왕위계승이었습니다. ‘十一年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다’ 『삼국사기』 「동성왕본기」 합영화라는 것은 이삭이 합쳐져 있는 벼를 말합니다. 원래 한 줄기에서 하나의 이삭이 나는 벼인데 또다른 이삭이 같은 줄기에서 나왔다는 것인데요. 국남해인, 나라의 바닷가 사람들이 바쳤다고 합니다. 무진주에 있던 세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는데요. 즉, 옹관묘를..
2023.11.08 -
박상진과 대한광복회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으로 국내 및 만주 북경 등지에서 대규모 무력항일 투쟁을 전개한 고헌 박상진 의사(1884~1921)를 조상한 제문이 지난 1986년 발견되었습니다. 이 제문은 박상진 의사가 순국한 지 2년 뒤인 1923년 7월 8일 대상 때 그의 아버지 박시규가 지은 것입니다. ‘유세차(維歲次) 계해칠월정사삭초팔일갑자(癸亥七月丁巳朔初八日甲子) 즉출계(卽出系) 망자상진지종상야(亡子尙鎭之終祥也)’로 시작되는 이 제문은 박상진 의사의 순국직후 각계의 반응, 가산의 몰락과정과 그 연유를 박상진 의사에게 묻는 형식으로 적고 순국 후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박상진은 1884년 경남 울산시 송정동에서 한말의 고관이며 대지주인 박시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박상진은 큰아버지 박시룡의..
2023.11.05 -
명성황후의 원수를 처단한 자객 고영근
역사를 자세히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범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기 힘듭니다. 다만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의 아버지라고 하면 그러냐고 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범선의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 꽤나 굵직한 사건에 중심에 있던 인물입니다. 그는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당시 일본이 경복궁에 데리고 들어갔던 조선훈련대의 제2대대장이었습니다. 1857년생인 우범선은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1월 서울에 처자를 남겨둔 채 일본으로 망명해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우범선은 망명 7년째 되던 1903년 11월24일,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한국에서 온 자객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어떤 일로 살해되었을까. 우범선을 살해한 자객은 고영근이었습니다. 우범..
2023.11.04 -
다물사리 소송사건
1596년 3월 13일 전라도 나주 관아에서 희한한 노비소송이 벌어졌습니다. 원고 이지도는 일흔이 넘은 여인 다물사리가 양인이라고 주장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스스로 노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자신은 양인이라 주장하고 상대방이 노비라 주장하는 재판이었을 것 같지만 여기서 벌어진 재판은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법에 따라 판결해달라는 시송(始訟)다짐 뒤 삷등(白等)을 했습니다. 삷등은 최초 진술을 뜻하는 옛말로 한자는 이두식으로 음차한 것입니다. 이지도는 다물사리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 소유 노비인 윤필의 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그 자손들도 자기 집안의 (사)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의 양천제(良賤制)에 따라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손도 노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물사..
2023.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