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과 대한광복회

2023. 11. 5. 09:1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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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으로 국내 및 만주 북경 등지에서 대규모 무력항일 투쟁을 전개한 고헌 박상진 의사(1884~1921)를 조상한 제문이 지난 1986년 발견되었습니다. 이 제문은 박상진 의사가 순국한 지 2년 뒤인 1923년 7월 8일 대상 때 그의 아버지 박시규가 지은 것입니다. ‘유세차(維歲次) 계해칠월정사삭초팔일갑자(癸亥七月丁巳朔初八日甲子) 즉출계(卽出系) 망자상진지종상야(亡子尙鎭之終祥也)’로 시작되는 이 제문은 박상진 의사의 순국직후 각계의 반응, 가산의 몰락과정과 그 연유를 박상진 의사에게 묻는 형식으로 적고 순국 후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박상진은 1884년 경남 울산시 송정동에서 한말의 고관이며 대지주인 박시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박상진은 큰아버지 박시룡의 양자로 입적하였는데 승정원 승지를 지낸 아버지와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백부 박시룡 등 박상진 일가는 울산의 손꼽히는 명문가였습니다. 박상진 의사는 17세 때 성균관 박사벼슬을 지낸 의병장 허위의 문하에 들어가 국권회복방략을 배웠습니다. 허위는 혁신유립의 대표적인 인물로 국난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킨 뒤 줄기차게 대일 무력 투쟁을 전개한 인물입니다. 신학문을 배울 것을 권유한 스승의 권유에 따라 박상진은 서울로 올라와 양정의숙에 입학합니다. 양정의숙은 1905년에 설립된 사립학교였습니다. 박상진은 이곳에서 법률학부에 입학, 근대 법률을 배웠습니다. 그의 스승 왕산 허위는 1908년 1월, 전국 1만 의병이 연합해 서울 탈환 진공작전을 벌일 때에 13도창위군의 선봉장을 맡았고 동대문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였습니다. 후에 청량리와 동대문 간 대로에 왕산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바로 왕산 허위를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산 허위는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혈전을 벌이지만 후속 부대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일제는 그에게 요직을 제시하며 회유하려 했지만 결사 항전을 펼치다 11908년 6월 체포되었고 그 해 10월 21일에 순국하였습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박상진의 가족들도 만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박상진은 목숨을 걸고 의병운동을 벌인 스승의 죽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박상진은 각종 사회단체에 가입하였으며 김좌진, 백산상회의 건립자 안희제, 도산 안창호 등을 만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한광복회는 전국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만주로 향했습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과정을 지켜본 뒤 암살 명령 폭동 비밀 등을 강령으로 한 무력항일투쟁론을 체계화시켰습니다. 이 때 박상진 의사는 손문을 직접 만나 혁명전쟁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고 권총을 선물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915년 달성공원에서 우재룡, 권영만, 채기중 등과 항일비밀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조직,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서간도의 부민단 신흥무관학교 등과 연계를 맺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의병장 신돌석과는 의형을, 김좌진 장군과는 의제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박상진 의사는 자신의 가산을 모두 정리, 총 24만원으로 김덕기, 오혁태 등과 대구에 상덕태 상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곳은  광복회의 실질적인 본부이자, 연락거점이었습니다. 한편 악질지주와 일제의 관공서를 슴격,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으며 이 밖에도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화폐 위조를 추진했고 국내에서는 실제 위조지폐를 제작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대한광복회는 17년 11월 10일 칠곡의 악질지주인 장승원을 사살, 지주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고 18년에는 아산군 도고 면장 박용하를 처단했습니다. 1916년 6월에는 신채호와 함께 조선총독사살을 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제의 수배를 받자 만주로 건너가려다 모친의 위독 소식을 듣고 집에 들렀습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또다른 사람들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경찰들이었습니다. 상주 주변에 포위하고 있던 일본경찰은 상중에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4년 간의 옥고 끝에 교수형으로 순국했습니다. 박 의사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 만세삼창을 한 후 다음과 같은 짧은 절명시를 남겼습니다.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세상에 다행히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 청산이 비웃고 녹수도 빈정거리는구나“
 박상진 의사의 독립운동은 국민들에게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3.1 운동이 전개되고 만주 상노령 지역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습니다. 박상진의사의 죽음은 온 국민에게 슬픔으로 받아들여졌으며 5. 4 운동 후 일제에 적개심을 가졌던 중국인들에게도 신문을 통해 애통하게 여겼으며 인도인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고 제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중국 숙친왕 아들 원헌은 박시규를 만나자 꿇어앉아 ‘현윤의 훌륭한 의열과 참혹한 죽음은 중국의 각 신문에도 자세히 보도됐다.’고 말한 것으로 제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제문에서는 박상진 의사가 체포된 뒤 아버지 박시규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밝혔습니다.
‘몸을 깨끗이 갖고 죽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어찌구구한 짓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저들과 더불어 삶을 구한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만약 제가 불행하게 되면 만리 밖에서 창황하게 될씰가 밤낮으로 걱정입니다. 한번 뵙고 영결말씀을 여쭈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광복회는 대구에서 결성된 항일무장단체로  1915년 8월 25일 결성되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지 5년만의 일입니다. 당시 경북지역에 거점을 뒀던 독립의군부·풍기광복단·달성친목회·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등 4개 단체가 합쳐졌습니다. 총사령에는 울산 출신의 박상진이 추대됐고, 우재룡과 권영만이 지휘장을 맡아 중심을 잡았습니다. 박상진이 총사령을 맡았던 항일무장단체인 광복회의 첫 '거사'는 1915년 12월 24일 새벽 경북 경주 효현교에서 벌어졌습니다. 혹한의 추위 속 현금을 가득 싣고 대구로 향하던 우편마차가 털리는 사건입니다. 이사건이 광복회의 첫 거사였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알려졌습니다. 당시 마차에는 일제가 경주·영덕·영일(현 포항) 등 3개 군에서 거둔 세금 8천700원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편마차가 대구로 이동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광복회 단원 우재룡과 권영만이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실행한 작전이었습니다. 환자로 가장한 권영만은 일본인인 우편마차 주인집에서 숙박한 뒤 대구 병원 치료를 핑계로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우재룡은 마차를 멈추기 위해 다리를 파괴하고 기다렸고, 권영만은 마차가 멈춘 사이 돈을 챙긴 후 달아났습니다. 사건의 진실은 광복 이후 작성된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일대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광복회의 활동은 대단히 전투적이었습니다. 광복회의 4대 강령은 ‘비밀, 암살, 폭동, 명령’이었습니다. 광복회에 대해 현대에서는 전쟁을 통해서만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조직이라고 평했습니다. 강령도 그랬고 조직도 군대식이었다고 합니다.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한인을 만주로 이주시켜 독립군을 양성하고, 다시 조선을 보내 일제를 몰아낸다는 것이 광복회의 가장 큰 목표로 보았습니다. 각 지부의 광복회 회원들은 사전에 조사한 재산 규모와 친일 행각의 정도에 따라 군자금 모금액을 통보했습니다. 국내 자산가로부터 의연금을 모금하고자 했던 것으로 그중에는 친일부자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돈을 내기는커녕 대부분 일본경찰에 신고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광복회는 이들을 민족의 적으로 치부하고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박상진의 부친 박시규가 지은 제문인 「제망자상진문」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의 이후에 삶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곱 집안 100여 명의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 옛 집을 지키기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박상진은 최고의 부를 자랑하던 집안이었지만 전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사용하고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져 떠돌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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