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최재형
2024. 1. 19. 09:2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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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습니다. 뤼순 일본 관동도독부 제 1호 법정에서 연일 안중근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끝내 일본은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안중근은 모두 혼자 꾸민 일이며 자금도 빌려서 마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중근은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숨겨야 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최재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나서 광복절을 하루 앞둔 2023년 8월 14일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1860~1920)과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1880~1952)의 넋이 꿈에 그리던 조국에서 해후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최 선생 부부 합장식을 거행했습니다. 최 선생 순국 103년 만입니다.
최재형 독립운동가는 1860년 8월 15일 태어나 열 살 때이던 1869년,최재형은 형과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중국 훈춘으로, 다시 러시아의 지신허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당시 이곳은 황무지에 가까웠습니다. 절대 빈곤한 지역이었으며 최재형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최재형 가족은 지신허에서 곧 연추(煙秋)로 이주하고, 그는 1871년 한인으로서 러시아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 되었으나 가난으로 학업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집을 나갔습니다. 하지만 갈 길이 없던 최재형은 노숙 생활을 하다가 러시아 상선 선장 표토르 세묘노비치 부부의 도움으로 1877년까지 세계 각지를 다니는 선원 생활을 하면서 폭넓은 견문과 경험을 쌓고 돌아왔습니다. 최재형은 녹둔도에서 군용도로를 건설할 때 통역을 맡아 그 공으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은급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연추지역이 러시아에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부각되었고 다수의 러시아 군대가 주둔하면서 이 곳에 이들을 수용할 건물과 거주에 필요한 연료, 식료품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그는 러시아 당국과 물류를 공급하던 한 옐리세이 루키치(한익성), 한 바실리 루키치 형제, 김 표트르 니콜라에비치, 최 니콜라이 루키치(최봉준) 등의 재력가들과 의형제를 맺어 상업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를 통해 러시아 군대에 대한 물품청부업 등을 통해 거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최재형의 소득은 매우 높았는데 연간 10~15만 루불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1912년 유명 기업의 판매상들은 33~35루블, 고급요리사는 45루블, 노동자들은 10~15루블 정도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최재형은 사업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시 외관을 정비하고 교육시설도 마련했습니다. 이런 일들로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 황제로부터 예복을 하사받기도 했으며 러시아 정부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훈장도 수여 받았습니다. 최재형은 러일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최재형이 러시아 군대와 인연을 맺은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연해주 연추는 급부상하는 도시였고, 최재형은 연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이자 인기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와 동등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최재형에게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1908년 5월 최재형은 반일의병 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임되었고, 부총장에 이범윤, 회장에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 서기에 백규삼 등이 선출되었습니다. 최재형은 동의회 총장의 이름으로 러시아 최초의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에 일본과의 대격전이 멀지 않았음을 공표하는 취지서를 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08년 7월 7일 의병들은 일본 수비대의 경비가 취약한 지점을 공격, 러시아의 국경지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습니다. 회령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64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의병들의 피해는 부상 4명에 그쳤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전투력의 이유에는 최재형의 무기 지원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군인들로부터 최신식 무기를 들여왔던 것입니다. 최재형은 동의회의 군자금으로 1만3000 루블이란 거금을 쾌척했고,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 편으로 1만 루블, 수청(水淸) 지방에서 6000 루블 등 모금이 이어지자 의병부대인 대한의군(大韓義軍)을 조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동의회 의병들은 주로 러시아, 조선, 중국 3개국을 넘나들며 수월하게 공격과 후퇴를 할 수 있는 두만강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벌였습니다. 조선 의병들의 적극적 전술에 놀란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였고 최재형을 항일의병의 배후로 파악하였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최재형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일본의 압력으로 러시아 정부는 적극적으로 의병을 통제하고 활동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 12월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최재형, 이종호, 오주혁, 황병길 등은 연추에서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습니다. 국민회 설립 목적은 해빙기에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는데 최재형이 회장, 이종호가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이어 1911년 5월 이종호, 김익용, 강택희, 엄인섭 등이 주축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勸業會)라는 이름의 반일활동 단체를 조직하였습니다. 회장에 최재형, 부회장에 홍범도가 선임되어 「권업신문」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했는데, 연해주에 사는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가입했기 때문에 규모도 상당했습니다.
창단 3년째인 1914년에는 회원이 85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세력이 확장되어 연해주의 대표적인 반일활동 단체로 부각되었습니다. 처음에 러시아 정부의 공인을 받고 조직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와 동맹국이 된 일본이 항의하였고 이 단체는 1914년 강제 해산당했습니다. 그리고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연해주에서 볼세비키혁명군의 적군(赤軍)이 일본군의 후원을 받은 백군(白軍)과 내전을 벌였습니다. 상황이 이러자 최재형은 적군을 지원하는 반일무장단체 독립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습니다.
1918년 6월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제2회 특별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대회에는 러시아 각지로부터 온 지역 및 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였는데 참석자 전원의 만장일치로 최재형은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대회에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는 러시아혁명 과정의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중립선언은 대회직후 발생한 체코군의 봉기와 일본, 미국 등 열강의 무력개입으로 이를 실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1920년 4월 4-5일, 일본군은 1920년 초 이래 득세하기 시작한 러시아혁명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스파스크, 포셋트 등지의 러시아혁명 세력과 한인들에 대한 불의의 습격을 가했습니다. 일본군이 대대적인 체포, 방화, 학살을 자행하여 4월참변으로 불리고 있는 이 사건으로 1천여 명의 러시아혁명군과 소비에트 · 빨찌산부대의 대원들, 그리고 일반주민들이 살해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4월 4일 당일 아침 최재형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갔고, 둘째 아들인 최 파벨 페트로비치 역시 빨찌산부대와 함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시를 떠났습니다. 최재형은 저녁 늦게 귀가하였습니다. 부인과 딸들은 일본군의 보복을 걱정하며 최재형에게 빨찌산부대로 도피하라고 독촉했습니다. 최재형은 도피할 것을 거절하면서, “만약 내가 숨는다면, 일본인들이 잔인하게 너희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나는 일본인들의 기질을 안다. 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학대하는지!”라며 부인과 딸들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다음날 아침 최재형은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김이직(金理直), 엄주필(嚴柱弼), 황카피톤 등 3명의 인사들과 함께 재판 없이 만행적으로 총살되었습니다. 상해에서는 상해거류민단의 주최로 3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재형과 순국한 인사들을 위한 추도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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