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병장 윤희순
2024. 2. 19. 09:5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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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춘천에는 의병대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의병 600여 명(일제의 고종 강제 퇴위에 항의해 일어난 정미의병) 속에는 아줌마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병사의 식사를 준비해 날라주고 옷가지를 세탁하고 부상자나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맡았지만 군사 훈련에도 동참했습니다. 일본군이 지나가는 것을 가상해서 찌르기 연습도 하던 이들 중에 47세의 아줌마가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윤희순, 춘천 의병대(의병장은 이소응)를 움직이는 실력자인 유홍석(1841~1913)의 며느리였습니다.
윤희순은 조선 말의 대학자였던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의 맏딸로 경기도 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506년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이었던 윤희평의 그녀의 조상이었습니다.
윤희순은 1876년, 16살의 나이로 시집갔습니다. 춘천시 남면 발산리, 산자락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살던 고흥유씨 집에 꽃가마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동네 아낙네들이 새댁 구경을 한다고 관솔불을 켜서 들고 왔는데 초가 처마 끝에 불을 너무 높이 들어 화재가 났습니다. 불길이 거세지자, 시아버지 유홍석은 신방에 있던 신부 희순을 번쩍 들어 안고 보리밭으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그때에도 윤희순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물단지를 들고 뛰어다녔던 것입니다.
신혼 무렵에 ‘남편은 성제 댁에 가 계시고 두견새처럼 살자니 항상 쓸쓸했다.’고 합니다. 성제는 시댁 종친인 대학자 유중교를 말합니다. 남편 유제원은 결혼하고 나서도 줄곧 학문에 몰두했으며, 어린 신부는 혼자 신방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윤희순이 첫 아이를 낳은 것은 1894년, 결혼하고 나서 2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1년 뒤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친일내각은 황후를 폐위 조치했습니다. 이에 시아버지 유홍석은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관군과 교전하다가 패배하고 춘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모았으며 춘천부사로 부임하던 조인승을 붙잡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조인승은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의 처형을 청한 인물이며 일제의 조선개혁안에 동의한 부역자(附逆者)였는데, 당시 단발령에 따라 머리를 빡빡 깎고 춘천으로 들어오다가 의병들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내집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거니 의복 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게 안윽하게 만져주세…’ 「안사람 의병가」 중
시댁에 의병 활동가들이 들락거려 윤희순도 남장을 하고 시아버지를 따라나서며 자기도 의병활동을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홍석은 반대했습니다. 그는 유교를 떠받드는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윤희순은 그 마음을 일시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희순은 집은 조용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시아버지와 남편을 일 년에 열 달은 바깥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출타한 사이에 의병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몹시 배고팠던 사람들이라 밥을 해달라고 청했으나 당시에 의병을 돕는 것은 무거운 죄였기 때문에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때 희순이 나서서 전장에 나선 시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들에게 상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의병들이 떠나고 난 뒤에 윤희순은 방에 앉아 붓을 들고 일제에 대한 경고문을 작성했습니다. 「의병가」 노래 가사를 짓고 아리랑 곡에 맞추어 불렀습니다. 그의 행동을 본 사람들이 집안에 어른들께 저녁이고 낮이고 노래를 부르는 윤희순의 행동이 걱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윤희순은 마을 여인들에게 안사람도 의병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으며 노래를 지어 부르며 의병대를 조직하려 했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래도 윤희순은 동네 아이들에게 「안사람 안병가」라는 노래를 지어 가르쳤고 동네의 유행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10년 간의 노력으로 마을에서 여자 의병대가 조직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시아버지도 들었는지 시아버지 유홍석도 관군의 회유책에 넘어가는 춘천 의병들을 보자, 「고병정가사(병사들에게 고함)」라는 노래를 지어 그들의 마음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춘천의 여성들은 수천 명이 모여 의병이 쓸 탄약을 만들었고 놋쇠를 모으고, 부족한 유황을 대신해 소변을 달여 화약을 제조했습니다. 이들의 힘은 이 지역 의병들에게 상당한 전력보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술국치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시아버지가 상심하여 자결을 생각하자 윤희순이 말렸습니다. 며느리의 말이 옳다 하여 유홍서과 유제원 부자는 만주로 떠났습니다.
1911년에 희순이 집에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 희순이 아들 유돈상을 회초리로 매질하였습니다. 유홍석이 의병 활동을 주도한다고 하여 들이닥친 것입니다. 그들은 17세의 소년을 때리며 유홍석의 거취를 알려달라고 협박하자 희순은 죽일 테면 죽이라며 자기도 같이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네 아비를 팔아 네 자식의 목숨을 살리겠느냐며 당당하게 맞서자, 결찰들은 쓰러진 소년을 내려놓고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희순은 짐을 싸서 중국 요령성으로 갔습니다. 1911년, 춘천에서 유씨 집안이 없어졌습니다. 의졍장 유인석과 유홍석을 중심으로 친척, 처가 45가구가 집단 이주를 했고 정착한 곳은 요령성 흥경현평정산 고려구였습니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마을이름만큼이나 주변에 조선인이 많은 곳으로 주변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근처의 한족들도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농법을 배웠습니다.
윤희순은 환인현 남괴마자 마을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아마 항일 인재 양성이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윤희순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독립투사들이 세운 정착학교 선생들이 와서 국어‧산수‧역사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3년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고 그 자리에 옥수수밭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197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72세를 일기로 돌아갔습니다.
1915년, 희순은 탄광촌인 무순시 포가둔으로 옮겼습니다. 윤희순은 중국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연대하자고 외쳤습니다. 그녀의 바람대로 많은 중국인들이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남편 유제원과 재종 시숙인 유인석 의병장이 잇따라 죽은 것도 1915년이었습니다.
1920년에는 간도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독립운동이 위축될 것을 우려하여 윤희순은 아들들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애국지사들을 찾아다니며 규합 활동을 벌였고 ‘조선독립단’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단장에는 윤희순, 유돈상, 유돈상의 장인인 음성국이었습니다. 이들의 가족, 친척들이 참여한 것입니다. 1932년에는 조선독립단에 기회가 왔습니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9월 15일에는 일본군 철도 운수선을 습격하기로 했습니다. 이 때 윤희순은 말이 먹을 풀과 군인 식사를 제공하는 일, 그리고 부상자를 치료하기로 했습니다. 이 때 희순의 나이 72세였습니다.
하지만 무순 함락작전을 실패로 끝났습니다. 희순은 어쩔 수 없이 봉성현 석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던 1934년 일본군이 들이닥쳤습니다. 일본군을 사흘이라는 시간을 주고 집을 모두 태워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사흘이 채 지나기도 전에 불길이 솟아올랐습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외출하고 여자들밖에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희순은 돈상의 갓난아이 연익과 둘째 아들 교상의 딸 영희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유돈상이 처갓집에 머물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무순감옥에서 고문에 시달리다 7월 19일에 순국했습니다. 절망에 울던 며느리도 이 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면 오죽 좋겠습니까, 우리는 만리타국에서 누굴 의지하고 살며 연ㅇ직이와 연익이 이 이런 것을 누구에게 맡겨오리까.’ 『일성록』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활약하던 윤희순은 일본군에 의해 잔혹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윤희순과 그 가족의 강렬했던 투쟁을 한글로 『해주윤씨 일생록』을 지어 남기고 1935년 8월 곡기를 끊은 지 12일 만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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