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2024. 2. 6. 09:4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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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이자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동생입니다. 생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로 본래 궁녀였던 양씨가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았습니다. 양씨의 친정 오빠는 백정 출신으로 조선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여동생 덕분에 관복을 입는 출세를 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졌지만, 덕혜옹주는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한 이후에 1912년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황녀였던 적은 없지만, 언론에서는 종종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덕혜옹주는 59세에 얻은 늦둥이여서 유독 총애를 얻었다고 합니다. 고종이 아기였던 덕혜옹주를 보기 위해 입실했을 때, 마침 유모 변복동 상궁은 누워서 덕혜옹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습니다. 예를 갖추기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덕혜옹주가 놀랄까 봐, 유모를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가 조금 자라자,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에 황실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기까지 했으며, 150m밖에 되지 않은 거리인데도 덕혜옹주가 가마를 타고다니게 했습니다. 이에 더해 같이 다닌 원생들도 사대부 가문의 딸들이었으나 덕혜옹주에게는 극존칭을 쓰도록 했으며 항상 시중을 들 궁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기록에서도 1912년 『왕조실록』에는 새로 태어난 아기에 관한 기술이 부쩍 늘어났는데 공주도 아닌 옹주에 관한 기사가 많아졌다는 것은 이례적이며 1910년 이후 무력해진 조선 왕실에서 옹주의 탄생은 큰 경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고종이 애지중지한 덕혜옹주였지만, 일제는 그를 조선의 황적에 올려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고종이 덕수궁 유치원에서 놀고 있던 덕혜옹주를 보여주며 자기 딸이라고 소개했고 비로소 황적에 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옹주를 애지중지하던 고종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였으니, 그때가 1919년이었습니다. 당시 고종 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조선의 민중들은 분노했고, 고종의 국장에 맞추어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사망은 옹주에게도 좋지 않았습니다. 
  덕혜옹주는 1925년 13살이 되었을 때 일본으로 강제 유학하러 갔습니다.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대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인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옹주는 고향을 떠나자마자 가쿠슈인 기숙사에서 생활했으며 당시 가쿠슈인 학생들은 선생의 지시에 따라 덕혜옹주에게 '토쿠에사마(덕혜님)''라는 존칭을 쓰며 예의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일본 학교에 입학한 조선 황족들은 맨 앞자리에 앉아 급우들과는 재질이 다른 넓은 책상을 단독으로 사용하거나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높은 의자에 앉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덕혜옹주는 그동안 신경쇠약에 시달렸습니다. 덕혜옹주는 늘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이를 궁금히 여긴 동창생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답했습니다. 그때 덕혜와 동갑내기이자 일본 의회정치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의 딸 소마 유키카 덕혜에게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당신은 왜 여기에 있나요라고 물었으나 덕혜옹주는 답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29년 5월 30일,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끝내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이때부터 처음으로 몽유병과 조현병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사망하였을 때 조선 왕실의 전통에 따라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했지만 왕족도 귀족도 아닌 어머니의 초상에 상복을 입을 수 없다고 일제는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193조 6항 왕공족은 황족, 왕족, 공족, 조선족 귀족이 아닌 친족의 초상에 상복을 입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는데 이런 것은 덕혜옹주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덕혜옹주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등교 거부 상태였으나, 설상가상 졸업 이전의 시점이던 이때는 이미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데다 혼담까지 오가고 있어, 당시에는 여자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습니다. 덕혜옹주가 학업을 마친 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이듬해인 1931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덕혜옹주는 이미 약혼하기도 했는데 8세 때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맺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종이 세상을 뜨면서 이는 무효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덕혜옹주를 일본 남성과 결혼시키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여긴다고 하여 혼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때는 몽유병이나 신경쇠약을 비롯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때라 치료가 우선인데 그것은 생각하지 않고 한창수가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려 했고, 결국 이 결혼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졌을 때 조선의 민중들은 비탄에 빠졌으며 「조선일보」 기자는 결혼식 사진에서 아예 남편의 모습을 지우기도 하였습니다. 이후의 덕혜는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가 1932년에 딸을 출산한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래도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소 다케유키는 오히려 아내를 신경 써주고 걱정하는 자상한 남편상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아내의 상태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한 것은 진심이었는지 아내를 향한 장문의 시를 남긴 적도 있었습니다. 
  일제 패망 이후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결국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고, 그 와중에 1947년 신적 강하를 당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결혼 20여 년이 지난 1955년 이혼했습니다. 다만 강제 이혼은 아니었고, 덕혜옹주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오빠 영친왕, 올케 이방자 부부와 합의하여 이혼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가 사라진 지 4년 뒤인 1950년, 서울신문사 기자였던 김을한은 덕혜옹주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하여 일본 도쿄에 방문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덕혜옹주와 혼담이 있었던 김장한의 형이었고, 가문 간의 인연으로 인하여 덕혜옹주를 찾았습니다. 김을한이 덕혜옹주를 발견한 곳은 일본 도쿄의 한 정신 병원이었습니다. 남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상태가 악화하고 경제적 곤궁으로 인하여 간병인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그 아내를 정신 병원으로 보낸 것입니다. 병원비는 남편 소와 오빠 영친왕이 감당하였습니다. 한때 대한제국의 황녀로 만인의 사랑을 받던 덕혜옹주의 비참하고 쓸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은 김을한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녀를 고국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당시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 왕족이 한국으로 돌아오면 일종의 구심점이 되어 정부를 위협할 존재가 될 수가 있다는 경계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6.25 전쟁까지 발발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황족들의 문제까지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유가 없었고 덕혜옹주는 그 이후로도 오랜 세월을 일본의 정신 병원에서 계속 보내야 했습니다.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그때 김을한이 머물고 있던 도쿄에 박정희 의장이 거쳐 가게 됩니다. 그리고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 김을한이 덕혜옹주의 귀국을 요청하는데 처음에 박정희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조선시대 왕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덕혜옹주의 환국을 도왔다고 합니다. 박정희가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과는 상관없이 전 국민이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옹주가 탄 NWA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흰색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한 노인이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아기시!"를 부르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옹주에게 젖을 물려 키운 유모 변복동이었습니다. 이후 변복동은 1972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옹주의 곁을 지켰다고 합니다. 덕혜옹주가 일제 패망 이전까지는 평민들의 삶보다 물질적으로 부유했던 건 맞지만,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한 사람의 인생이 마냥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일제가 민중들의 기억 속에서 덕혜옹주를 지우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덕혜옹주는 물질적으로 풍족했을지 몰라도 일제 치하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았던 사람 중 한 명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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