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와 우리말 큰사전

2023. 6. 24. 17:1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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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탄압을 받은 인사들이 조직한 십일회 회원들의 모습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1936년 12월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이어 1941년에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을 공포합니다. 이는 조선에서 일체의 반일사상을 탄압하고 사상범을 감시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에 이어 1941년 <문장(文章)> 등 한글 「잡지」도 폐간되었습니다. 이미 이전에도 1938년에 조선어 교과목을 폐지한 바 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포 한글에 대한 탄압은 심해질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민족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조선어연구회였습니다. 1921년 설립된 조선어연구회는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인 최두선ㆍ권덕규ㆍ임경재ㆍ장지영 등이 참여했습니다. 발족은 휘문고보에서 했으며, 주시경 선생은 이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연구회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한글」이라는 기관지를 창간합니다. 그리고 1926년에는 훈민정음 반포 480년을 기려 ‘가갸날’을 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한글날입니다. 이와 더불어 조선어사전편찬회도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어느새 같은 이름의 어용단체를 만들어 은밀히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결국 연구회는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꿔 문맹퇴치와 함께 우리글ㆍ우리말을 보급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으며 특히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마련하고, 1936년에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는 『조선어대사전』을 출판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전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은 있었는데요. ‘말모이’입니다. 주시경,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이 1910년 무렵 조선 광문회에서 편찬하다 편찬자들의 사망이나 망명으로 작업을 끝내지 못한 사전 명칭입니다. 말모이 편찬 작업 당시 이미 외국인들은 7, 8종의 한국어 사전을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1930년 한글날 기념식 석상에서 유지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서 맞춤법 통일, 표준어, 들온말 적기법(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 사전 편찬을 위한 밑작업이 그려졌습니다. 
 그러던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전에 일제는 한글과 관련된 조선어학회 활동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가 감시하던 1941년 즈음은 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을 듯한 사람에 대해 심증만으로 잡아들이는 시기였습니다.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께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

정태진

그러다 한 여학생의 일기 내용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1942년 함흥 영생여고보 4학년 박영희의 일기장인데요.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에 몰두하던 석인(石人) 정태진에게 갑자기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날아옵니다. 박영희의 2학년 일기 한 부분에 일본어 사용을 반대한다고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발견됐고 배후에 정태진이 있다는 쪽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정태진이 마침 사전 편찬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빌미로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의 단체이며 사전 편찬 작업이 독립 운동의 일환이라는 등의 자백을 억지로 받아냅니다. 이를 근거로 1942년 10월1일부터 1943년 3월6일까지 45차례에 걸쳐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 검거 선풍이 불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일본 경찰에 잡힌 사람은 모두 33명이었습니다. 일제로부터 치안유지죄로 몰린 이들 가운데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한징, 정열모, 장지영, 장현식 등 16명은 기소, 12명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습니다. 기소돼 예심에 회부된 사람들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문후유증 등으로 1943년 12월에 이윤재(1888~1943)가, 1944년 2월에는 한징(1886~1944)이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그리고 장지영과 정열모가 공소 소멸로 석방돼 최종 기소된 이는 12명이었습니다.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
실형을 받은 사람 중 정태진은 복역을 마치는 것이 오히려 상고보다 빠르다 해 복역을 마치고 1945년 7월 1일 출옥하였습니다. 이극로(1893~1978), 최현배(1894~1970), 이희승(1896~1989), 정인승(1897~1986)은 판결에 불복, 바로 상고했으나 같은 해 8월 13일자로 기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틀 뒤에 해방되면서 8월 17일 이들은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조선말 큰사전」 원고의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선어 사전 편찬의 결실이었지만 1942년 경찰에 압수된 뒤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8일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조선말 큰 사전>의 초고가 발견되었습니다. 무려 2만6500여 장 분량의 방대한 양이었습니다. 당시 이 원고를 얻게 된 조선어학회는 무척 기뻐했을 것입니다.  1942년 경찰에 압수돼 3년 동안 그 행방을 알 길이 없었는데 당시 원고의 발견은 중단됐던 조선말 사전 편찬 사업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원고가 발견된 것은 다름 아닌 한글학자들의 노력이 컸습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이들은 판결에 불복, 상고했는데 이에 따라 증빙 자료로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송했던 것이 전쟁 말기 경황없는 가운데 그대로 창고에 방치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이 선택한 ’판결 불복 상고’라는 법정 투쟁은 의미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조선말 큰 사전」 원고를 지켜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조선말 큰사전」의 초고를 얻게 된 한글학자들은 원고의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인력과 경비가 부족했으므로 아무래도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휘의 통합과 분리, 추가, 삭제 등 원고의 전면 손질에 들어간 지 2년여가 지난 1947년 10월9일에 첫 번째 『조선말 큰사전』이 발간되었습니다. 이는 총 원고 분량의 6분의 일 정도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첫번째 사전의 출판 때부터 책값을 싸게 책정해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949년 5월 둘째 권이 발행되었습니다. 1950년 6월에는 셋째 권이 제본 중이었고, 넷째 권은 인쇄 마무리 단계까지 진행되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이로 인해 함락된 서울의 조선어학회의 건물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인쇄는 중단되었고 남은 4,5,6권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10여 명의 한글학자들이 이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옛 회관에 숨겨둔 원고를 한 달 동안 베껴 쓰고 또 베껴 써 두 겹 독으로 땅에 묻었고 원본은 천안으로 옮겨 땅 속에 묻은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도 이들의 한글작업에 제동을 걸지 못했습니다.  1952년 10월28일까지 넷째 권 원고 교정을 마쳤으며  1953년 1월7일부터는 전주에 임시 사무소를 차리고 다섯째, 여섯째 원고에 대한 수정도 계속해 나갔으며 5월 26일에는 결과물이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작업에 다시 걸림돌이 생겼습니다. 1954년 7월 공포된 정부의 ‘한글 간소화(簡素化)’ 방안이 그것입니다. 한글 파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한글 간소화를 강요하는 것으로 이것의 골자는 발음기호, 즉,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33년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를 붙였는데요. 이를 위해 당시 문교부 장관인 김법린을 물러나게 했고 아울러 한글학회의 큰 사전 편찬 사업을 지원하던 미국의 록펠러 재단 물자도 막아버렸고 이승만 정권은 유네스코의 한글학회 사업 5개년 계획 원조도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한글 간소화’ 정책은 사회 각계 지식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힙니다. 이에 권력의 지지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 정권도 더 이상 정책을 강제할 수 없어 한글 간소화 정책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글학회의 지원단체인 미국의 록펠러 재단도 원조를 재개되었으며 1957년 10월9일에는 『우리말 큰사전』이 완간되었습니다. 사전에는 일반 어휘 외에도 주요 전문 용어와 유명한 땅 이름, 책 이름, 명승고적의 이름도 망라해 편찬했으며 일반지식 사전을 겸할 수 있도록 다양한 단어를 망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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