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핀 조선여성 엘리트 최영숙

2023. 6. 22. 18:5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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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 스크랜턴이 창설한 사립 여자교육기관이 설립한 이화학당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다니던 최영숙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1906년에 태어난 최영숙은 이화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23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난징 명덕(明德) 여학교와 회문여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이 덕에 중국어도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26년 그가 향한 곳은 스웨덴이었습니다, 그가 이곳으로 향한 이유는 스웨덴에서 만나고 싶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스웨덴 출신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운동가인 엘렌 케이였습니다. 엘렌케이는 서양사람이었지만 당시 구한말 우리나라 지식인들 사이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1925년 조선일보에서는 ‘21세 청춘 8개월된 임부, 3세여아를 업고 대동강에 자살’이라는 신문기사를 실으면서 엘렌 케이를 인용하였고 한국의 첫 근대소설 ‘무정’에도 엘렌 케이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엘렌 케이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서 ‘연애(戀愛)의 시대’를 열어젖힌 여성학자라고 하는데요. 하지만 최영숙이 스웨덴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경기도 여주군 태생으로 방년 21세 된 최영숙 양은 지난 7월13일 밤 하얼빈에서 구아연락열차를 타고 멀리 스웨덴을 향하여 떠났다. 최영숙 양은 사회과학을 연구하려고 단신으로 만리타국으로 간다고 한다. 지난 9일 기선(汽船)을 타고 상하이를 떠나 다롄에 상륙했을 때, 최영숙 양은 일본경찰에게 잡혀 큰 고초를 겪었다 한다. 그는 후일 고국에 돌아와 몸과 마음을 오로지 고국에 바치기 위해 이 같은 고생을 무릅쓰고 공부하러 멀리 떠난다 한다. 그는 나이 어린 여자의 몸으로 일어와 중국어, 영어에 정통하고, 매사에 재주가 뛰어나다. 최근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한다 하며, 이번에도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을 많이 가지고 가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한다.”(‘동아일보’, 1926년 7월23일자)

스웨덴 동료와 함께한 최영숙

  스웨덴으로 가는 그는 언어에 재능을 보였던 것 같은데요. 당시 그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본이 아닌 지구 반대편으로의 유학은 엄청난 금액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비용을 최영숙이 감당하면서 체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수 놓는 일을 하다가 스웨덴 말을 배우면서 스웨덴 왕가의 아돌프 황태자와 함께 그의 도서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 한문에 능통하고 스웨덴어까지 구사하는 그녀는 아돌프 황태자가 가장 신뢰하는 연구원으로 황태자의 번역 일은 그의 몫이었습니다. 이 때 아돌프 황태자는  1926년10월 조선을 방문해 ‘서봉총(瑞鳳塚)’ 발굴 현장을 찾기도 했습니다. 서봉총’의 첫 글자 ‘서’는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런 최영숙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스웨덴으로 유학하기 전에 만난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습니다. 최영숙은 중국 난징에서 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때 최영숙은 공부하는 틈틈이 상해로 가서 중국에 망명 중이던 여러 인사와 교류했습니다. 최영숙은 시정부에 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습니다. 최영숙은 안창호에게 큰 감화를 받았는데요. 총명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최영숙을 안창호도 남달리 아꼈지만 문제는 최영숙은 그보다 더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1906년생인 최영숙과 1878년에 태어난 안창호는 28살 차이였으나 최영숙은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최영숙을 제자로서만 아꼈던 안창호가 나무라기도, 타이르기도 했으나 최영숙은 안창호의 침실에 뛰어들어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안창호는 최영숙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럴진대 내 인간을 죽이려는 것이니 차라리 이 권총으로 나를 쏴라"하니  최영숙은 마음을 접고, 도산처럼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이후에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을 생각하며 스웨덴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해외유학이 만만치 않을 것인데 100여 전 나라 없는 처지에 먼 이국땅에서의 유학생활은 더 고단했을 것입니다. 그 역시 ‘서전의 풍경은 내가 어릴 때에 지리를 배우면서 상상하던 풍경은 아니었으며 또한 언어 풍속 등이 전혀 다르고 아는 사람조차 없으니 어찌 외롭고 쓸쓸하지 않았으리까? 그래서 나는 한달 동안은 밤이나 낮이나 울기만 했답니다.’라며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조선을 모르는 학우들과 어울리는 것도 스트레스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지만 차츰 적응해나간 최영숙은 ‘다른 동무들과 똑같이 여름이면 수영으로, 겨울이면 스키로, 이렇게 세월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만하게 자미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던 일이 지금 와서는 끝없이 그리워집니다’라고 술회하기도 했습니다. 
‘인도는 중국과 애급과 마찬가지로 상고(上古)문명국이다. 그러나 그 찬란한 역사와 문명은 오늘날에는 다 어디가고 지금은 일개 섬나라인 영국의 지배밑에 있다. 산천에 흐르는 젖과 꿀은 어이해 인도의 딸과 아들의 살과 뼈를 기르는 데 아무런 인연이 없어졌는가.’ (‘인도유람’1, 조선일보 1932년2월3일)
이후 최영숙은 인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일을 1932년초 신문에 「인도유람기」란 이름으로 실기도 했습니다. 

.반나체인 그의 끝없이 수척한 팔과 다리! 코끝에 반쯤 걸린 안경, 쾌활한 웃음을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몇 개 안남은 웃니! 크고 둥근 머리 꼭대기에 서너 오라기 뒤로 늘어진 긴 머리끝. 이같이 그의 외모는 보잘 것 없지만 그의 인격! 그의 정신! 그의 행동은 세계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인도유람’3, 조선일보 1932년2월5일)
 최영숙은 인도에서 약 4개월간 머무르며 인도 여성독립운동가 나이두를 만나고 간디의 집을 방문하는 등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는 그의 연애 상대도 있었으며 결혼여부는 알 수 없으나 임신한 채 귀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귀국 후 그는 미리 가입해 둔 동우회의 경성여자소조에서 활동했습니다.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 운동과 노동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좌담회와 강연회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나, 대공황 등의 여파로 취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학하는 동안 가세도 많이 기울어 가족들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스웨덴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고 국제적 네트워크를 갖춘 역량이 있었지만, 식민지 조선은 여성인 그에게 일할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신문 기자, 교사 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조선 여성은 옛 인습과 제도에 얽매여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못했다. 어려서는 식모로, 민며느리로 끌려가고 커서는 기생으로 팔려간다. 설령 공장 직공, 버스 차장, 전화 교환수가 돼도 남성과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없다.’ 언론인 함상훈의 기고, 「조선 여성에게 보내고 싶은 말」
당대 엘리트이던 최영숙은 서대문 밖 교남동에서 채소가게를 열었습니다. 운영난을 겪던 ‘여자소비조합’을 인수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서 자그마한 점포를 빌려서 배추, 감자, 미나리,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당시 스톡홀름 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 직업이 되었답니다.’ -잡지 『삼천리』, 1932년 5월호
하지만 채소 장사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린애를 가진 몸에 영양부족, 소화불량, 그는 각기병까지 걸려서 두 다리는 차차 부어올라오기 시작했으며 결국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1932년 4월11일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산모 상태가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고 태아를 꺼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호전되지 않아 4월13일 세상을 떴습니다. 조선 엘리트 여성 최영숙의 죽음은 미혼으로 알던 조선의 첫 여성 경제학사가 혼혈아를 낳았다는 이야깃거리만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인청년 로이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였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인도에 와서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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