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가 한국으로 온이유

2023. 6. 18. 18: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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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월, 일본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수용소에 한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일본에서 형사처벌을 받은 외국인들, 불법 체류자와 밀입국자를 강제 송환시키는 곳으로 이곳에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1,2년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 발로 찾아온 사람의 이름은 스나가 나가하루라는 일본에서 꽤나 이름있는 과학자였습니다. 그가 이곳에 와서 강제로 한국으로 송환을 요청하니 수용소는 절대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단교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에게 한국으로 가는 방법은 수용소를 통한 강제추방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오히려 한국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는 상황에서 일본에서 촉망받는 과학자가 반대의 길을 요청한 것입니다. 수용소 측에서 강제송환을 거부하자 그가 꺼내보인 것은 자신의 호적등본, 그는 한국 사람으로 우장춘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우장춘은 1903년 11월 24일 일본 히로시마현의 작은 도시에서 한국인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8년 전 사건 을미사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우장춘의 동생이 태어나자 그의 어머니 혼자서 둘을 키우기 어려워 우장춘은 도쿄의 한 사찰에서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 그의 어머니가 그를 찾으러왔을 때 우장춘은 몹시 말라있던 상태였다고 합니다. 우장춘은 어머니를 만나 같이 살 수 있었으나 학창시절 ‘센진노코(조선 놈의 자식)’이라는 놀림을 받았습니다. 일본 이름은 나가하루였지만 성은 우 씨였기 때문입니다. 
"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아무리 짓밟혀도 꽃을 피운단다. 우리 아들도 낙심하지 말고 저 민들레처럼 꽃을 피워봐."
아이들과 싸운 후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고 어머니가 해준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수학에서 항상 1등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이공계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런 그에게 조선총독부가 장학금을 주겠다며 , 자신들이 가라는 학과에 진학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친일파를 만들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생각이었습니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차별을 받았고 일본 역시 조선인들이 똑똑해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때라 우장춘에게 조선총독부의 제안은 솔깃한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었던 우장춘은  도쿄제국대학 농학 실과에 입학하는데 정식 대학 과정은 아니고, 농업 기술자를 양성하는 전문학교입니다.

우장춘이 어렸을 적 가족사진

하루 종일 농장에서 비료 옮기고 삽질하고 말 그대로 농업 실무만 배우는, 힘들고 고된 일이었고 이로 인해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이 속출했지만 우장춘은 버텼습니다. 그렇게 신입생신분이던 시절, 그의 학교에 조선의 한 도지사가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들을 위하여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 
"여러분들은 천황폐하의 막중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해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시오"
이 말에 분노한 와세다 대학의 김철수란 학생이 단상에 올라가 그의 멱살을 잡았고 강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말을 몰랐던 김철수에게 일본말로 상황을 물으니 김철수는 조선말도 모르는 놈이 무슨 자격으로 왔냐고 호통을 쳤고 그의 아버지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우범선이라는 걸 알게 되자 김철수는 기가 막혀하며 당신 아버지는 매국노라며 아버지가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고 살고 싶으면 성을 바꾸지 말고 조선을 독립을 위해 살라는 충고를 듣게 됩니다. 
이후 일본 농림성의 국립농사 시험장에 취업한 우장춘은 이웃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와타나베 코하루라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처가댁은 그가 조선인이라며 반대했지만 와타나베가 친정과 의절하면서 결혼에 골인한 것입니다. 우장춘은 농사시험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성과를 냈지만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부서가 벼, 밀, 보리 등을 연구하는 부서가 아닌 꽃을 다루는 부서에 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차별 속에서도 우장춘은 세계 최초로 겹꽃 페튜니아 종자를 개발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 종자가격은 금값의 10배로 이것을 활용한 종묘회사는 돈방석에 앉게 되었지만 우장춘은 별로 이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농사시험장에 불이 나  장춘의 연구, 결과, 실적 그리고 논문까지 붙 타고 말았습니다, 그 날은 도쿄국제대학에 그가 논문을 제출하기로 한 하루 전이었습니다. 6년이 흘러 1936년 5월 4일, 장춘의 나이 38세에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당시 진리처럼 여겨지던 찰스 다윈의 한 이론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다윈은 진화의 원동력을 자연도태라 설명하며 자연환경에 보다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아 계속 자손을 남기며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의구심을 품은 우장춘은 로 다른 종이 자연 상태에서 교잡해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유채가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종이라는 걸 발견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배추와 흑겨자가 교잡해 나온 게 갓이라는 것도 발견합니다. 이런 우장춘의 이론은 종의 합성이론이라 하였으며 우장춘이 교잡종을 설명한 삼각형 모양, 이걸 'Triangle of U' 즉, '우의 삼각형'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과에도 조선인인 우장춘에 대한 차별은 계속되었고  '배추 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는 스나가라는 성을 얻었음에도 나가하루 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귀국환영회 우장춘박사

그런 그에게 이제 막 해방을 맞이한 대한민국이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우리나라에서 기아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일본이 철수하며 종자산업과 관련된 모든 시스템과 자료를 다 가지고 가 버렸고, 농업 기술자들도 일본으로 떠난 상황에 우장춘 박사가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국교단절 상태인 상황에서 수용소 생활을 감수하며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친일파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장춘은 대한민국으로 향합니다. 한국정부는 어려운 결정을 한 우장춘에게 100만원 당시 공무원 연봉의 1년치를 지급했지만 이마저도 우량종자를 사는데 썼습니다. 하지만 그의 한국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온 얼마 안 있어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열악한 한국의 상황 속에서도 결구배추라고 하여 이전과 다른 속이 꽉 찬 배추를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우 박사가 제주도의 따뜻한 기후에 맞게 대량생산 할 수 있도록 귤을 개량했으며 무와 감자도 병충해에 강하고 일정한 크기로 자랄 수 있도록 개량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농민들은 육종학이라는 새로운 농업학문에 반감을 가졌고 이에 이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하기 위해 우장춘 박사는 기하라 히토시라는 일본인이 만든 씨 없는 수박을 소개합니다.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 박사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우장춘 박사의 합성이론을 토대로 만든 것으로 이를 통해 육종학의 필요성과 우수성을 알렸습니다. 이로 인해 우장춘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는 오해는 생겼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일본에서 들려왔으나 국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우장춘은 일본으로 귀국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는, 그가 일본에 갔다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까봐. 둘째는,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아서였고 그렇게 우장춘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자들이 연구소 강당에 빈소를 마련해 주고 이 소식을 들은 전국각지에서 조의금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 조의금으로 우장춘은 연구소 근처에 땅을 파서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란 이름의 자유천이라는 우물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가뭄이 극심했고 연구소도 물부족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1959년 어느 날, 농림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정부에서 문화포장을 수여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3일 뒤 1959년 8월 10일, 우 박사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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