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새문 그리고 돈의문

2023. 6. 19. 18:5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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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392년 개국되어 이후 한양도성을 1396년에 축조하였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보수와 개축을 거쳤으나 그 원형을 조선 말기까지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서울의 성곽은 수난을 겪었습니다. 1899년 전차가 다니면서  돈의문(서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주변의 도성 일부를 헐어냈으며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서울성곽 철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선인(鮮人) 동화를 위해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산성(山城)이란 것이 조선 도처에 있고 고명찰(古名刹), 가람(伽藍) 등은 거의 배일(排日)이란 역사적 재료를 가지고 있다. 몇 년에 왜적을 격퇴했다든지 하는 등의 글귀가 변기에조차 써있다. 점차적으로 제거해야 선인 동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통감부-
1907년  일본 왕자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숭례문(남대문) 바로 옆의 성곽 일부를 헐어버렸으며 1908년 3월 11일, 일제는 흥인지문 주변의 성곽을 헐어내고 본격적인 성곽 철거에 들어갔습니다. 급기야 1915년, 도로를 확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돈의문까지 흔적도 없이 파괴해 버렸습니다. 돈의문과 달리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철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문화재로서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숭례문은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곳이고 흥인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한 의미에서 남겨두었으니 우리에게 다시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린 셈입니다. 

그러던 지난 2010년 서울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복원되지 않은 돈의문의 현판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돈의문 현판은 가로 233㎝, 세로 108.3㎝ 크기로 현판의 치수를 통해 건축물의 양식과 각종 기법뿐 아니라 복원 설계에 필요한 각종 치수의 추정도 가능해졌다고 했습니다. 현판 크기에 비례법을 적용해 주칸(기둥의 간격)의 크기와 영조척(건축물을 지을 때 적용하는 기준 길이로 보통은 1척이 290~330㎜ 내외) 등 기본적인 사항부터 건축물의 전체 높이, 홍예(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아치)의 크기 등에 대한 세부사항까지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현판은 가로 233㎝, 세로 108.3㎝ 크기에 앞면에 ‘敦義門(돈의문)' 세 글자가, 뒷면에는 ‘신묘년 11월15일 숙종 37년(1711년) 유학 조윤덕이 쓰고 이후 2월18일 영조 25년(1749년)에 영건소에서 개조’라는 내용의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돈의문은 서대문이라고도 불립니다. 서울 성곽 4대문 가운데 서쪽의 큰 문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습니다.
 ‘의를 북돋운다’는 의미를 가진 돈의문이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입니다. 하지만 돈의문이 완공된 지 8년째에 접어든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었습니다. 풍수학자 최양선이 풍수적인 이유를 들어 옮길 것을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이 성문을 지을 때에 당대 최고 실력가인 이숙번의 집 앞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숙번은 상왕 정종의 거처인 인덕궁 앞에 세우는 것이 낫다고 건의합니다. 따라서 그의 말에 따라 태종 대에 서전문(西箭門: 서살문)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는데요.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돈의문과  서대문 중 어떤 명칭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지난 1996년 말엔가 국보 제1호 '서울남대문'과 보물 제1호 '서울동대문'의 공식지정명칭을 각각 '서울숭례문(崇禮門)'과 '서울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바꾼 사례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러한 조치를 두고 흔히 일제가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왜곡했던 것을 바로 고친 사례라고 알려지긴 했으나, 이는 약간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남대문이나 동대문이란 이름을 딱히 식민통치자들이 악의적으로 왜곡한 결과라고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돈의문은 어떨까요. 서대문의 본디 이름이 돈의문(敦義門)이었고, 달리 신문(新門) 즉 '새문'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종로 방면에서 경희궁 쪽을 이어지는 도로의 이름이 '새문안길'인가 하면 그 양편으로 새문안교회도 있고 또 '신문로'라는 동네가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무엇보다 서대문이라는 명칭이 제일 익숙한데요.  행정구역 자체가 '서대문구'라 하였고, 서대문로터리에다 지하철 서대문역이 있으며, 오래 전 서대문형무소나 경부선 서대문정거장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각문의 월단과 누합을 작(作)하매, 정북은 숙청문이라 하고, 동북은 홍화문이라 하니 속칭은 동소문이고, 정동은 흥인문이라 하니 속칭은 동대문이고, 동남은 광희문이라 하니 속칭은 수구문이고, 정남은 숭례문이라 하니 속칭은 남대문이고, 소북은 소덕문이라 하니 속칭은 서소문이고, 정서는 돈의문이라 하고, 서북은 창의문이라 하다." 『조선왕조실록』
실록에서는 한양 도성문에 대한 속칭을 전하면서도 돈의문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내에서도 서대문에 대한 기록은 드물다고 합니다. 그보다 통용되는 이름은 ‘새문’으로 그 이유는 원래 있던 서전문(西箭門)을 없애고 돈의문을 새로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성(京城) 팔문은 정남은 숭례라 하며 속칭으로 남대문이라 부르고, 정북은 숙청이라 부르고, 정동은 흥인이라 하며 속칭으로 동대문이라 부르고, 정서는 돈의라 하며 속칭으로 신문(新門)이라 부르고, 동북은 혜화라 하며 속칭은 동소문이라 부르고, 서북은 창의라 하고, 동남은 광희라 하며 속칭으로 남소문이라 하고, 서남은 소덕이라 하며 속칭으로 서소문이라 부르고 또 수구문이 있어 이 양문으로 장사지낼 사람이 나간다." 『지봉유설』
역시 다른 기록에서도 서대문이라는 명칭보다는 새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발간되는 언론지 「독립신문」에서도 한결같이 '새문밖'이니 '새문안'이니 하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대한매일신보」에서도 서대문정거장을 새문정거장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1926년에 경성부공립보통학교교원회에서 편찬한 「향토자료 경성오백년」에는, "신문 즉 내지인(內地人)이 서대문이라 부르는 것은 이전에… 운운"하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밖에 마츠다 코(松田甲)의 「조선만록」(조선총독부, 1928)에도 "돈의문을 조선인은 신문, 내지인은 서대문이라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에게는 서대문으로 통했고 일제강점기 내내 편의상 부른 이름이자 널리 사용된 명칭이 서대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새문’ 혹은 ‘서대문’이라 불린 돈의문이 없어진 것은 1915년 일제 전차 궤도 복선화 사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총독부 토목국 조사과에서 돈의문의 경매입찰을 진행했고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50원 50전에 낙찰되었다.’ -「매일신보」, 1915년 3월 7일
이후 일제는 돈의문을 팔아 이익을 챙겼고 돈의문의 석재와 목재뿐만 아니라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성벽까지 무너뜨려 도로공사 자재로 사용합니다.  사대문 중 가장 늦게 지어졌지만 헐리기는 가장 빨리 헐린 돈의문에 대한 복원은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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