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조지 쇼우

2023. 5. 31. 14:5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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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이 일제강점기에 의해 힘들어할 무렵 많은 독립투사들이 활약했었고 그 중에는 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4월 한 외국인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조지 쇼였습니다. 1880년 1월 25일 중국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의 파고다 아일랜드(Pagoda Island)에서 아버지인 영국 아일랜드계 사무엘 루이스 쇼와 어머니 일본인 엘렌 오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00년경 한국의 금광에서 회계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된 쇼 선생은 1907년 중국 안동현(현재 단동시) 영국 조계에 위치한 단동시(丹東市) 원보구(元寶區) 흥륭가(興隆街) 25호에 무역회사 겸 선박대리점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설립합니다. 그리고 이 이륭양행은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거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상해에서 안동현까지는 이륭양행(怡隆洋行) 배편을 이용하였다. 이것은 아버님과 남편이 상해에 갔을 때도 이용했던 선편으로 임시정부와 국내를 잇는 주요 통로의 하나였다” – 정정화 『장강일기』 중에서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책임졌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6번이나 국내에 잠입했던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중국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했습니다. 쇼의 회사와 배는 치외법권 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이륭양행 건물에 교통국을 설치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정부의 자금모집, 국내·외 정보 수집 보고, 정부 지령, 서류 전달, 연락 등을 담당했습니다. 쇼는 한국 독립 운동가를 적극적으로 보호했습니다. 상해를 오갔던 독립운동가 중 이륭양행 소유의 배를 이용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였습니다. 백범 김구 역시 3.1운동 직후 중국 단둥에 도착했다가 이륭양행의 배인 계림호를 타고 상해로 망명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상해로 가는 지름길은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안동에서 상해로 망명하는 것이었고 안동교통국이 설치된 이후에는 1919년 10월 조선조 고관 출신의 김가진이 아들 김의환과 함께 이륭양행 배를 이용해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11월에는 정보가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기는 했지만 의친왕 이강도 이륭양행을 통해 망명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교통국의 통신원이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수송할 때에도 쇼의 도움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쇼가 군자금을 이륭양행의 명의의 수표로 발행해 주면 통신원은 그 수표를 쇼가 거래하는 상해 회풍은행에서 현금과 교환해 임시정부에 교환한 것입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가 위장 명칭인 강남공사 이름으로 부치는 선전물이 중국우편으로 안동의 이륭양행에 도착하면 교통국 상주 요원이 마대에 담아 중국인을 시켜 압록강을 넘어 의주지국으로 보내 전국으로 배포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일제의 의심을 샀습니다. 임시정부를 지원한 대가로 쇼는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1920년 7월11일, 쇼는 평안북도 신의주 기차역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오는 아내와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떠난 길이었습니다. 죄목은 여권 미소지. 일제는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과 함께 쇼를 내란죄로 기소했습니다. 그러나 치외법권 대상인 쇼를 체포하는 것은 위법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쇼의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은 반발, 쇼의 무죄를 주장했고 일본은 쇼를 석방했습니다. 쇼의 체포와 석방 과정을 두고 반일감정이 확산됐다. 이를 계기로 일제의 부당한 한국 지배가 세계적으로 알려졌습니다.

1890년 조지 쇼 가족사진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쇼가 독립운동가 김문규에게 한 말
쇼는 1921년 1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로부터 금색곤로장을 받고 난동으로 돌아와서는 겉으로는 한국인과의 관계를 끊고 근신하는 척하면서 비밀리에 조선을 돕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1921년 3월 안동해관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김문규를 이륭양행의 직원으로 채용해 비밀통신, 정보 수집, 군자금 모집, 무기 보관 및 전달업무 등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김문규를 조선의 치안을 위협하는 인물로 규정, 1922년 8월 형사를 몰래 안동에 보내 김문규를 체포한 뒤 국내 신의주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이후 안동교통사무국은 사실상 해체되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일본 사무라이 집안의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1912년에는 일본인아내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둘째아들도 나중에는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3대에 걸쳐 일본인 아내를 맞이한 집안 내력을 볼 때 일본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쇼의 활동을 보면 철저하게 반일적이었습니다. 대체로 중국에 있던 영국 상인들은 사업상 일본인과 경쟁하는 처지여서 반일적인 성향을 가졌습니다. 때문에 1914년 상하이에서 일본상품배척운동이 전개될 때 쇼도 앞장서서 반일활동에 가담하였습니다. 쇼의 반일적인 성향은 사업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민족해방을 꿈꾸는 아일랜드인의 혈통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쇼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일랜드는 16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독립과 자치를 사이에 두고 지속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쇼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1916년 4월 아일랜드인들은 ‘부활절 봉기’를 일으켜 영국과의 혈전을 감행하였고 1919년 1월부터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1921년 겨울 애영조약愛英條約의 체결로 1922년 1월 아일랜드자유국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인은 완전한 독립국이 아닌 영국 자치국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 평소 식민지 한국인의 처지를 아일랜드인과 비교하며 동정하던 쇼는 때마침 아일랜드인들이 전면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할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한국 독립을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쇼는 망국민을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독립의 열망을 가진 한국인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습니다.
조지 쇼는 또다른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미국인인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에서 독립운동가 김산이 조지 쇼의 활약에 대하여 남긴 증언을 다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의열단은 여덟 개의 전략적 건축물을 파괴하고 모든 대도시에 있는 일본인 관헌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비밀리에 200여 개의 폭탄을 한국에 들여왔다. 폭탄은 단둥에 있는 영국계 회사 앞으로 보내는 의류품 화물상자에 넣어 이 회사 소유의 기선에 실어 상해에서 보냈다. 단둥회사의 지배인은 아일랜드인 테러리스트였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그를 ’샤오‘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했다. 그래서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원해 주었다. 샤오 자신이 상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였다. 그는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스스로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단둥에 있는 그의 집에 숨었다. 샤오는 일본 경찰에 체포 되었고, 또 자기 직업을 잃어버렸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그는 상해로 갔으며, 임시정부는 대규모 대중집회를 열어 그를 환영하였다. ’샤오‘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이런 희생을 한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말했다.’
그동안 쇼를 감시하며 사업방해를 서슴지 않았던 조선총독부는 1931년 만주 침략을 계기로 어용회사인 대안기선공사를 설립해 이륭양행 매수공작과 쇼의 축출을 강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축출공작에 따라 쇼는 1935년 2월 대안기선공사에 이륭양행의 선박과 압록강 항로권을 매각하였고 1938년 4월 경영난을 못 이겨 이륭양행의 본점을 푸저우로 이전시켰습니다. 쇼가 떠남으로써 안동을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의 지원활동도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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