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김염

2023. 5. 28. 14:4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728x90

1935년 한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대로>(大路)’, 이 영화에 대한 인기는 대단하여서 당시 출연한 주연배우는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영화 황제로 기억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주인공의 이름은 '김염(金焰, 본명 김덕린, 1910~1983)'이며 바로 한국인입니다. 그리고 중국영화계에서 ‘황제’라는 칭호가 붙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염의 아버지는 김필순으로 그는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세브란스의학교(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의술로써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입니다. 김염 뿐만 아니라 그 형제들인 김덕홍(金德洪), 김위(金瑋), 김로(金蘆) 또한 독립운동에 힘썼으며 필순의 형인 김윤방(金允邦)과 김윤오(金允五), 여동생인 김구례(金具禮)와 김순애(金淳愛), 조카딸 김마리아도 모두 독립운동에 열정을 바쳤습니다. 특히 김구례는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의원을 지낸 서병호(徐炳浩)의 아내이며, 김순애는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로서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을 지낸 김규식(金奎植)의 아내였습니다. 또한 김마리아는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상하이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를 지냈으니 그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자제로서 그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독립운동가를 도왔습니다. 김필순은 자신의 형인 김윤오와 함께 세브란스병원 건너편에서 '김형제상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신민회의 비밀 모임 장소였던 것입니다.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 조작해 신민회의 주요 인사를 포함한 독립운동가 700여 명을 구속하고, 그중 105명에게 실형을 언도한 사건이 일어나자 김필순은 위험을 감지하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김필순은 서간도에서 자리를 잡고 의술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던 1919년 음력 7월 7일,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본인 의사가 전해준 우유를 먹고 건강이 악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김염은 고모의 손에 의해 키워졌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고모부인 김규식과 그의 아내는 하숙을 치며 살았는데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고 고모부 서병호의 전부인 소생 아들 진동과 계속 부딪히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상하이 고모집에서 생활한 지 9개월이 지났을 때 그는 산둥의과대학에 다니는 큰 형 김영(덕봉)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큰 형의 주소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형 집에 사는 처음 몇 달 동안은 행복했으나 고달픈 형의 형편에 다시 텐진으로 이사한 둘째 고모집으로 돌아왔으며 고모부 김규식 박사가 텐진의 난카이대 교수자리를 얻으면서 난카이 중학교 급사일을 하며 3학년 청강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운동회에 달리기 대표선수로 출전하여 두 번의 예선에서 1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승전이 되어 출발선에 섰는데 구경꾼들 중에 이런 말이 오고 갔습니다. 
“저 조선족이 빨리 뛰는 것은 당연하지, 일본의 주구(走狗, 달리는 개, 앞잡이)니까.”


그는 이 말을 한 학생에게 주먹을 날렸고 고모부가 아니었으면 퇴학당할 뻔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퍼져 난카이 대학에 입학하려는 조선인 학생들은 입학을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김염은 영화배우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이따금 영화를 보고 그 분위기에 빠져 들었고, 영화잡지를 숨겨놓고 보다 고모부에게 들켜 혼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즈음 그는 상하이행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영화사(民新影片公司)의 어떤 감독과 잘 안다는 허신런(許心仁)이라는 텐진 주재 기자의 소개장 하나 얻어 들고 친구들이 모아 준 돈 7위안에서 6위안으로 배표를 사고 상하이로 향한 것입니다. 당시 상하이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가 조계(租界)라고 하는 치외법권 지역을 확보하여 외국계은행들, 중국의 27개 은행 중 22개 본사가 자리를 잡아 금융의 중심이가 되었고 강대국들의 보호 아래 이곳은 비자 없이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분방한 이곳을 무대로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김염은 허우야오 감독을 찾아가서 서 영화사의 기록계원 자리를 얻을 수 있었으나 다른 사람의 농간으로 곧 쫓겨나고 극장 검표원 겸 극장지기로 일하며 여전히 영화인으로서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를 주의깊게 본 완레이추안 감독이 난궈라는 유명한 영화사의 톈한(田漢) 감독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는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자금이 부족하여 [살로메]라는 연극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번째 공연을 하는 날에 주연배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관중들의 불만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대체하여 올려야 했는데 그가 바로 김염이었습니다. 그는 두 달 동안 매일 그 연극을 보면서 공부했고, 특히 주연배우 대사는 달달 외우며 연기연습을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극을 마치고 나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연극으로 번 돈으로 영화를 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김염도 다시 극장지기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쑨유감독이 단역으로 출연한 김염을 눈여겨보고 그를 자신의 영화 [풍류(風流)검객]에 출연시킵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쑨유감독은 김염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의 눈에 띈 것은 그의 출중한 외모와 더불어 중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발음이었습니다. 중국에는 수많은 방언이 존재했던 바,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서 표준어 구사는 필수였습니다. 이후 그는 여러 편 영화의 주연을 맡았는데, 특히 1932년 '야초한화(野草閑花)'에 당시 최고의 여배우 롼링위(阮玲玉)와 출연하면서 최고 인기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1930년대 대표적 사실주의 영화로 꼽히는 항일영화 '대로(大路)'(1934)를 포함하여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그는 당시 많은 중국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진옌(金焰)’을 알아보고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그 다음에는 [들장미]에 신인배우 왕런메이(王人美)와 함께 출연하였습니다. 이 영화도 대 히트를 하여 왕런메이 또한 유명배우가 되었으며 1934년 두 사람은 결혼하였습니다. 

영화 '야초한화'에 롼링위(阮玲玉)와 호흡을 맞춘 김염(왼쪽), 영화 '대로'에 출연한 김염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난 것은 1932년이었습니다. 이 일은 한국인을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국민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킬 작품을 만들고자 하였고 그것이 바로 1934년에 내놓은 [대로]라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김염이 발탁되었으며 영화는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이후 [알전매]에서는 의적이 되는 경비대장역을 맡았고 [장지릉운]에서는 도적을 물리치는 청년 지도자, [폭풍 속의 매]에서는 홍군과 힘을 합쳐 마을을 지키는 지도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사회적인 영화들에 출연하였고 상업적인 영화들은 출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빼어난 용모와 인기, 그리고 그의 영화 행보에 사람들은 많은 호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1934년 영화잡지 『전성』에서 인기투표를 실시하였는데 가장 잘생긴 배우, 가장 친구가 되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 있는 배우 세 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제국주의 홍보영화에 출연하라는 일제의 요청이 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 ‘기관총으로 나를 겨둔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다.’라며 거절했고 종전 이후 중국이 공산화가 된 이후에도 그는 순수 예술가의 길을 걸으며 공산당 가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고 ‘커피와 버터를 좋아한 반혁명 분자’로 수용소에 끌려간 후 병을 얻어 1983년 12월 27일 김염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930년대 중국 영화의 성장시대를 대표하는 스크린에 김염이란 태영이 나타나 화려한 빛을 뿌리지 않았더라면 중국 영화의 동년시대는 1930년대를 메우고도 끝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김염의 진보적인 형상에 의해 중국 영화의 봉건성과 규치성은 더 이상 머리를 들 수 없었다. ’ 『중국 영화 백년사』
‘그의 연기에는 나라를 잃은 조선인으로서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정신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영화감독 쑨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