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자 이우

2023. 5. 16. 06: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191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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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승기를 잡게 되자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엄청난 수의 피해자를 냈고 대한 제국의 왕족이자 일본 제국 육군 중좌였던 이우도 포함되었습니다. 발견 즉시 바로 해군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결국 다음 날인 8월 7일 오전 5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고 전에 이우는 일본에 가길 꺼려했다고 합니다. 그는 일본의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해방 이후의 조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역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둘째 여동생 이해원은 "지금 일본으로 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권총을 들고 소란을 피웠지만 군인 신분이던 이우는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고  결국 여동생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1912년 11월 15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왕 이강이 살던 집에서 흥영군 이우가 태어났습니다. 이우 왕자의 호는 염석, 상운이며, 의친왕의 차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에 순종적이던 형 이건과 달리 일제에 반항적이었기에 의친왕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자로 불릴 수는 없었습니다. 1910년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이우 공자, 공위를 계승한 뒤에는 이우 공 전하로 불리었고 현대에서는 이우를 조선의 마지막 왕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이 친히 의친왕의 둘째 아들 어린 이우의 손을 잡고 운현궁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 아이로 하여금 운현궁을 잇게 하라." 하였습니다. 고종이 임명한 운현궁의 종주 이우는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흥왕이 되어야 할 당당한 황가의 일원이나. 1910년 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되면서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자, 흥왕이 아닌 공작으로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경성유치원과 종로소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1941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우가 사관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1926년 12월1일 공포된 '왕공가궤범' 때문입니다. 일본 왕실령 제17호로,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 18세가 되면 육군, 해군 무관으로 임관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1929년  4월1일 이우가 사관학교에 들어간 날부터 11월14일까지 226일간의 일상을 기록한 일지가 있습니다. '어훈육일지(御訓育日誌)'.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 제4중대 1구대장 사토 중위가 쓴 감시일지입니다. 사토는 이우가 체격은 왜소하지만 체력이 강했고 교관에게는 반항했지만 동료에게는 너그러웠다고 썼습니다. 7월5일 국어시간에 '불사조' 강의를 듣자 즉각 수업을 거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일본의 군인으로 키워진 것은 일제가 조선황족을 일본의 군인으로 임명해 일제 치하의 조선을 정당화하기 위한 홍보였습니다. 그럼 의미에서 일제는 덕혜옹주(德惠翁主)나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처럼 이우 왕자를 일본인 귀족의 딸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이우 왕자는 이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이우 왕자는 일본인이 아닌 조선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결국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박영효(朴泳孝)의 손녀 박찬주(朴贊珠)와 혼인을 했습니다. 그는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이청, 이종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인 이청은 이우의 사망 이후 일시적으로 공위를 계승해 이청 공 전하로 불렸습니다. 그는 미국 마케트 대학교를 졸업한 뒤 설계 사무소의 엔지니어로 근무했으며, 귀국 후에는 석파 학술 연구원을 설립해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차남 이종은 브라운 대학교 유학 중인 1966년 미국서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마지막 왕자 이우가 2000년대 들어 화제가 된 것은 그의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진한 쌍꺼풀과 시원시원한 눈매 그리고 얼굴로 단숨에 여심을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대한 제국의 실상을 다룬 영화 '덕혜옹주'에서 이우 왕자 역은 미남 배우 고수가 맡았던 것은 이우 왕자자체가 미남이었기 때문일 것이며 오늘날의 이우 닮은 꼴로 아이돌 그룹 엑소의 리더 수호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의 외모는 당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의 성격은 어땠을까. 그의 형은 일본에 고분고분했다고 전해지지만 이우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일본군장교로 키워졌지만  누구와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바로 조선 욕설을 퍼부으면서 팔뚝을 걷어 부치던 다혈질이었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 몇 안되는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패망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미국도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조선이 걱정”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일본군장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라는 딱지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사관학교 재학 시절에도 한국인 육사생도에게는 커다랗게 한국말로 호령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에게는 사납고, 난폭하여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한국 동포에게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했다고 합니다. 이우는 술자리를 가지면, 꼭 '황성옛터'를 불러 고국의 그리움을 달래곤 하였는데 그에게 전해지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우가 서울에 있을 때 하루는 전라도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에게 몰려와 호소하였습니다. 그들이 호소한 것은 일본군이 호남평야의 곡창지대에 작전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채면서도 보상을 안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우는 "내가 해결하겠다."면서 즉각 용산의 일본군사령부로 달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도로건설을 담당하던 장군을 만나 공사를 취소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담당 장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이에 이우가 해결을 위해 취한 방식이 즉시 권총을 빼어 장군의 머리에 겨누며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며 그를 몰아부쳤고 즉시 죽여주마라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전라도 농민의 청원은 이루어졌고 이우는 상관에 대한 항명에도 불구하고,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우는 1940년 육군대학 54기를 졸업하는 것으로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북지방면군 제1사령부 정보참모로 근무하며 중좌까지 진급하였습니다. 한편 그가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우의 독립운동은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것이 알려지기도 전에 히로시마에서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남겨진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이우는 정보참모로 있으면서 판세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이 판단되면 이 태항산의 유격대와 주변 백두산 근방의 독립군들, 일본군내의 한국병사들과 연합하여 일본의 관동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대한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황족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당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버렸습니다. 이에 이우는 장장 6개월을 버티며 전출을 거부합니다. 어린 아들 청에게 설사약을 먹여 병간호를 위해 늦게 간다고까지 하면서 히로시마로의 배속을 늦추고자 하였습니다. 그 사이 이우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키워놓은 태항산 유격대를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시키고자 계속 태항산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동계급 부관이자 일본정부가 임명한 감시원인 요시나리는 그에게 히로시마에 가도록 설득합니다. 요시나리는 이우를 감시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우의 사람됨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시나리의 설득으로 그는 운현궁을 나서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역사적 그 날의 비극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우는 피폭되었고 일본군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치료를 위해 도쿄로 이송되었어 호전될 것 같던 그는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우의 장례를 치른 후 요시나리는 자신의 책임이라며 할복자살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7년 이우 왕자의 위패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전 국민이 분노했습니다. 유족들은 그의 위패를 내려달라고 했으나 일본 측은 당시 이우가 일본인 신분으로 참전했기에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하며 아직도 이우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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